47. 고유섭의 골동관 1-1 「만근(輓近)의 골동수집 - 빈번한 부장품의 도굴」... 2011.11.28
우현(又玄) 고유섭(高裕燮: 1905∼1944)은 우리나라 근대 미학 및 미술사의 비조(鼻祖)라 일컬어진다. 고유섭은 인천 출신으로 1925년 서울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철학과에서 미학과 미술사를 전공하였다. 1930년 졸업 후 경성제국대학 미학연구실의 조수(현재의 조교)로 근...
46. 손진태의 민예관 2011.11.21
1935년 8월에 간행된 잡지 『삼천리』 제7권 제7호 「文藝-民藝隨錄」에 사학자이자 민속학자인 손진태(孫晉泰: 1900-?)의 글이 실렸다. 손진태의 본관은 밀양(密陽), 호는 남창(南滄)이다. 경상남도 동래에서 출생하였고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문학부 사학과에서 역사학과 사...
45. 치과의사 함석태: '호고(好古)일당'의 나들이 2011.11.14
인곡(仁谷) 박창수(朴昌洙: 1895-1961), 청정(靑汀) 이여성(李如星: 1901-?), 상허(尙虛) 이태준(李泰俊: 1904-?), 근원(近園) 김용준(金瑢俊: 1904-1967), 김기림(金起林: 1908-?) 등 이른바 '好古일당'은 경기도 광주의 분원과 양수리를 답사한 후, 이여성은 『춘추』...
44. 치과의사 함석태: 淸福半日 (2) 2011.10.31
「晴福半日」(함석태가 『文章』 1940년 1월호에 쓴 글) 계속 勿論 牛山은 風流畵家임을 모른바 아니로되 보고나니 果然 百聞이 一見을 敵할 수 없다. 門을 들어서니 欣然이 맞아주는 主人의 風貌와 함께 正面에 걸려있는 阮堂古額인 豊士室을 對할 때에 스스로 지금 들어온 門이 斷俗門이 아닌가를 疑心하겠다....
43. 치과의사 함석태: 淸福半日 (1) 2011.10.24
「晴福半日」은 함석태가 『文章』 1940년 1월호에 쓴 글이다. 당시 그의 나이는 51세였다. 서예가 손재형, 소설가 이태준, 화가이자 미술평론가인 김용준, 서양화가 길진섭, 배정국 등이 등장하며, 지금은 고급 주택가가 된 성북동의 옛 정취를 느끼게 해준다. 이 글을 통해 함석태의 인문적 교양을 알 수 ...
42. 치과의사 함석태:「공예미」 2011.10.17
「공예미」는 함석태가 1939년 9월에 간행된 『文章』 제1권 제8호에 쓴 글로서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이 글을 통해 함석태의 고미술품 특히 조선 도자기, 민속품 등에 대한 애정을 확인할 수 있다. 아울러 1930년대 당시 한국에서 유행한 다도(茶道)에의 관심을 볼 수 있으며 명치유신, 유학, ...
41. 치과의사 함석태: 수장가로서의 평가 2011.10.10
수장품 처리 유형현 단계에서 우리나라 근대의 고미술품 수장가들의 수장 취향 등을 온전히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수장품의 전모는 물론 대략적인 내용도 충분히 조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장택상⋅이병직은 도자와 서화, 오봉빈⋅박창훈은 서화, 박병래는 도자 수집에 전념했다는 사실과 이...
40. 치과의사 함석태: 함석태의 수장품 (3) 2011.10.04
1938년 11월 8일에서 12일까지 오봉빈의 조선미술관 주최, 매일신보사 후원으로 경성부민관(京城府民館)에서 개최된 대규모 서화전람회인 조선명보전람회(朝鮮名寶展覽會)에 함석태는 6점의 작품을 출품하였다. 그 가운데 최북, 권돈인, 김수철의 작품은 1934년의 '조선중국명작고서화전람회'에 출품된 것과 같...
39. 치과의사 함석태: 함석태의 수장품 (2) 2011.09.26
이밖에 1935년 6월에 간행된 월간 종합지 『三千里』 제7권 제5호에서 춘원 이광수는 그의 처 허영숙에게 보낸 편지에서 "세계에 자랑할 온갖 도기 등 미술 공예품을 가지고 있는 인사" 가운데 장택상의 도자기 5점과 김찬영의 도자기 5점, 함석태의 도자기 "李朝染付竹梅長甁, 李朝鐵砂龍筆筒, 李朝白磁四角甁...
38. 치과의사 함석태: 함석태의 수장품 (1) 2011.09.19
한국인 최초의 치과의사이자 일제강점기의 손꼽히는 수장가 함석태가 소장했던 고미술품의 수효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일제의 소개령(疏開令)에 따라 고미술품을 "세 차나 싣고 왔다"는 손자의 전언을 통해 대단한 수효였음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1935년에 조선총독부에서 간행한 『조선...
37. 치과의사 함석태: 금강산연적 2011.09.05
사학자 손진태가 1935년 8월 1일에 발간된 잡지 『삼천리』 제7권 제7호에 쓴 「문예 - 민예수록(民藝隨錄)」에 "삼각정(三角町) 함석태씨가 민예품 중에도 특히 목공품을 수집하신다는 말을 위창(葦滄: 오세창)선생으로부터 듣고 한 번 찾아 갔으나 불행히 만나지 못하였다"고 한 것을 보면 함석태의 고미술...
36. 치과의사 함석태: '小物珍品大王' 2011.08.22
의사학(醫史學) 연구자들은 함석태의 고미술품을 수집을 강우규 의사의 손녀를 거두어 키운 것과 같이 나라와 민족을 사랑한 일면으로 보는 등 우호적인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함석태는 일제시기의 주요 수장가의 한 사람으로 꼽힐 만큼 많은 우수한 고미술품을 많이 소장했던 인물임은 틀림없지만 그가 고미술품을 수장...
35. 치과의사 함석태: 강우규 의사의 손녀를 기르다 2011.08.16
1936년 경성일보사에서 펴낸 『대경성공직자명감(大京城公職者名鑑)』은 당시 47세인 함석태에 대한 기본적 자료와 취미사항, 인물평 등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대경성공직자명감』에 기재된 내용으로 미루어 함석태는 자신의 직분에 충실하고 일제의 시책에 협조하며 인망을 얻은 인물로 짐작된다. ...
34. 치과의사 함석태: 최고의 치과의사 2011.08.08
조선총독부 치과의사면허 제1호함석태가 당시로서는 생경한 학문분야인 치의학을 전공으로 선택하게 된 동기는 상세하지 않으나 함각의 인터뷰에서 볼 수 있듯 경제적으로 대단히 유복한 가정환경과 사회사업에 힘쓰는 등 '개화'한 집안이었기에 선진 학문 분야를 습득하는 데에 큰 거부감이 없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함...
33. 치과의사 함석태: 최초의 한국인 치과의사 함석태 2011.07.25
이번 연재부터는 치과의사 함석태(咸錫泰: 1889-?)의 일생과 수장에 대하여 연재하고자 한다. 1930-40년 당시 대표적인 한국인 수장가 가운데 한 사람인 함석태는 우리나라 치과에 관한한 최초의 기록을 섭렵한 인물이다. 한국인 최초의 치과의사이자 한국인 최초의 치과 개업의인 함석태는 당시 주요한 고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