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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 치과의사 함석태: 강우규 의사의 손녀를 기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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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경성일보사에서 펴낸 『대경성공직자명감(大京城公職者名鑑)』은 당시 47세인 함석태에 대한 기본적 자료와 취미사항, 인물평 등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대경성공직자명감』에 기재된 내용으로 미루어 함석태는 자신의 직분에 충실하고 일제의 시책에 협조하며 인망을 얻은 인물로 짐작된다.

  출신지: 평안북도 영변군 오리면(梧里面) 세죽동(細竹洞) 61(원적)
  현주소: 경성부(京城府) 삼각정(三角町) 1
  가족관계: 부 함영택(咸泳澤), 모 어머니(64세), 부인(45세), 자녀 장남(28세), 장녀(22세)
  학력: 일로전쟁(日露戰爭) 당시 일본에서 유학. 1912년 일본 치과의과학전문학교(齒科醫科學專門學校)를 졸업하고 이후 3년간 실시연구(實施硏究).
  경력 및 활동: 삼각정(三角町) 총대(總代). 1914년 봄에 조선으로 귀국하여 현주소에서 현재
업종에 종사. 삼각정 위생조합을 조직하고 장(長)이 되어 20여 년간 위생방면에 노력함.
  수상: 한성치과의사회로부터 부내 보통학교 아동구강 진사(診査) 공로자로서 2회 표창 받음.
1935년 2월 경성부윤(京城府尹)으로부터 위생조합장 20년 근속으로 표창 받음.
  취미 특기: 서화, 분재, 여행, 하이쿠(俳句), 골동, 꽃꽂이, 특히 전다(煎茶)를 좋아함.
  기호품: 술, 담배, 떡, 과일.
  인물평 외모: 일본 및 조선 고유의 미풍을 존중하고 상부상조를 강조, 정민(町民)의 존경을 받음.


함석태 일가 사진: 화면 오른쪽 교복 입은 소녀가 강우규 의사의 손녀 강영재가 아닐까 싶다.


강우규 의사(1855-1920): 일제강점기 때 활동한 독립운동가.
제3대 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의 마차에 폭탄을 던졌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체포되어 사형 당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이밖에도 1919년 9월 2일 오후 5시 남대문역(서울역)에서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을 저격했던 강우규(姜宇奎: 1855-1920) 의사의 어린 손녀 강영재(姜英才)를 함석태가 맡아 키워 이화여전까지 졸업시켰다는 사실을 특기할 만하다. 이 사실은 한성치과의사회를 설립한 것과 함께 그의 민족의식의 일면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예로 여겨진다. 1930년 5월 19일 남강(南崗) 이승훈(李昇薰) 사회장에 부의금 5원을 쾌척하였고 1943년 11월 7일에는 박흥식, 예종석, 윤치호, 한상룡 등 도합 90여 명과 함께 서울YMCA에서 학병제 경성익찬위원회를 조직하는 데에 참여하였다.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일본 유학까지 마친 함석태는 총독 암살을 시도한 민족운동가의 딸을 거두어 키우고 한국인만으로 구성된 협회를 조직하기도 하였지만 실생활에서는 일본식 생활풍습과 취미를 가졌으며 학병을 모집하는 데에 참여하는 등 일제의 시책에 충실히 협조하며 살아갔다. 함석태의 이와 같이 모순된 삶의 양태는 친일이나 극일이라는 이분법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식민지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의 혼란스러운 삶의 단면으로 생각한다.

이밖에 1945년 9월 8일 해방공간에서의 전단 가운데 하나인 "한민당, 임정 외에 정권 참칭하는 단체 및 행동 배격 결의 성명서"에 '한국민주당발기인' 육백여명이 넘는 인사들 가운데에 이름이 올라 있는 것 등을 볼 수 있지만 그가 정치색을 가졌다기보다는 명사의 하나로서 이름이 올라간 것이 아닐까 싶다.
 

편집 스마트K
업데이트 2024.12.02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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