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학(醫史學) 연구자들은 함석태의 고미술품을 수집을 강우규 의사의 손녀를 거두어 키운 것과 같이 나라와 민족을 사랑한 일면으로 보는 등 우호적인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함석태는 일제시기의 주요 수장가의 한 사람으로 꼽힐 만큼 많은 우수한 고미술품을 많이 소장했던 인물임은 틀림없지만 그가 고미술품을 수장하게 된 동기는 분명하지 않다. 그의 고미술품 수장벽이 민족문화유산에 대한 사랑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호고(好古) 취미 때문인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은 것이다.
1919년 종로를 통과하는 고종의 장례행렬. 왼편 위에 '이 해 박는 집'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이 간판은 정식 치과가 아닌 '입치사(入齒士)' 최승용의 간판으로 여겨진다. 입치사는 인공치아를 만들어 심어주는 이들로, 당시는 치과의사와 입치사를 구분하는 법률이 없을 때였다. |
다만 함석태는 앞에서 보았듯이 서화, 골동 외에도 분재, 꽃꽂이, ‘특히’ 전다(煎茶: 차를 달임)를 좋아하였기 때문에 이런 류의 취미가 고미술품 수장활동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함석태의 고미술품 수장활동에 대해서는 그와 교류했던 인사들 특히 장택상의 집에서 이루어진 모임을 주목해야 한다. 당대 최고의 수집가들로 이루어진 동호인 그룹으로 일종의 '살롱'이라할 수 있는 장택상의 집에 출입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의 고미술품에의 열정과 감식안을 보증하는 예라 할 수 있다.
1930년대 초반 장택상의 집에서 이루어진 모임은 한국 근대 고미술품 소장과 유통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33년 장택상이 대구에서 서울 한복판 수표동으로 이사한 후 장택상의 집은 고미술품 수장가와 호사가들의 주요 모임 장소가 되었다. 당대의 부호이자 탁월한 국제 감각, 능란한 외교력, 뛰어난 감상안을 갖춘 장택상의 집은 동호인들의 일종의 공동 회합장소가 된 것이다. 당시 장택상의 사랑방에 모이던 고미술품 수집가들은 초대 내무부장관을 지낸 윤치영(尹致暎), 치과의사 함석태, 한성은행 두취(頭取: 총재)를 지낸 한상룡(韓相龍)의 배다른 동생인 서화수집가 한상억(韓相億), 서화가 이한복(李漢福), 배화여중 교장을 지낸 이만규(李萬珪), 화가 도상봉(都相鳳), 손재형(孫在馨), 이여성(李如星), 의사 박병래 등이었다. 박병래는 이 모임을 “(장택상 사랑방에서) 저녁때가 되면 그날 손에 넣은 골동을 품평한 다음 제일 성적이 좋은 사람에게 상을 주고 늦으면 설렁탕을 시켜먹거나 단팥죽도 시켜 놓고 종횡 무진한 얘기를 늘어놓다 헤어지는 게 일과였다.”고 하였다. 함석태는 문학가로 유명한 상허(尙虛) 이태준(李泰俊)과 교유하는 등 당시 서울의 명사 가운데 하나였다.
함석태 소장, <백자양각매화문주전자(白磁陽刻梅花文水注)>, 높이 3寸,4分 5厘, 『조선고적도보』 15(1935) |
소물진품대왕
백자 수집가로 유명한 박병래는 "함씨는 그 열성이 하도 대단해서 심지어 기인 소리를 들을 정도의 일화를 남긴 분"이라고 기억할 정도로 함석태의 고미술품에 대한 집착과 애정이 컸다. 박병래는 함석태가 "성품이 온아하고 다감한 인정을 가진 분"으로 언급하고, "그는 실로 감읍할 정도로 골동에 애착을 가졌던 분…(경제적 타산과 관계없이) 함씨가 골동에 들인 정성은 정혼(精魂)을 기울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침저녁 신들린 사람처럼 골동을 부비며 애완하는 모습은 일견 사기그릇의 반질반질한 멧물(釉藥)의 표면을 뚫고 왕래하는 정신의 소작인 것 같기도 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또 함석태는 "특히 작은 물건을 좋아해서 (도자기로 만든) 바늘통이며 담배물부리 같은 것을 잔뜩 사 모았"고, 박병래의 아버지가 "한번은 함석태 씨를 보고 '함선생, 골동을 하면 망한다는데 어떻소'하고 물으니까 함씨가 '그야 서화를 하면 망한다지만 골동은 안 그래요'라고 대답했다."고 전한다. 이 일화를 통해 함석태가 서화보다는 도자기 등 공예품을 많이 수집한 연유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백자 전문가로 유명한 박병래도 그의 조언으로 가짜를 판명한 적이 있을 정도로 함석태의 감식안은 탁월하였다.
함석태 소장, <청화백자매화문연적(染付梅花文水滴)>, 높이 9分5厘, 길이, 1寸6分5厘, 폭 1寸1分조2厘, 『조선고적도보』 15 |
함석태의 고미술품 수집에 대한 화상 오봉빈의 '소물진품대왕(小物珍品大王)'이라는 유머러스한 평이야말로 그의 치밀한 성품과 소장품의 경향에 대한 적확한 표현으로 여겨진다. 함석태가 호를 '토선(土禪)'이라 한 것은 그가 도자기를 특히 좋아하였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토선(土禪) 함석태 씨야말로 모든 일을 샐 틈 없게 하는 이다. 소털을 쏟아서 제 구멍에 쏟는 이가 있다면 아마 이 함 씨라 할 것이다. 이가 모은 서화골동 전부가 다 기기묘묘하고도 모두가 실적(實的)인 물건뿐이다. 이모저모로 보아도 좋은 물건뿐이다. 이런 점으로 보아 무호(無號) 이한복씨(李漢福氏) 수장품(守藏品)은 함 씨가 유사(類似)할 것이 많이 있다. 요모조모로 이 기기묘묘하며 소품이면서도 대물거품(大物巨品)을 능가(凌駕)할 만한 - 간단히 말하면 조선에서는 소물진품대왕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