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학자 손진태가 1935년 8월 1일에 발간된 잡지 『삼천리』 제7권 제7호에 쓴 「문예 - 민예수록(民藝隨錄)」에 "삼각정(三角町) 함석태씨가 민예품 중에도 특히 목공품을 수집하신다는 말을 위창(葦滄: 오세창)선생으로부터 듣고 한 번 찾아 갔으나 불행히 만나지 못하였다"고 한 것을 보면 함석태의 고미술품 수집 취미는 당시 경성의 식자층 사이에서 익히 알려진 내용으로 여겨진다. 함석태는 고미술품 수집에 대한 몇 가지 일화를 갖고 있다. 이들 일화는 그의 고미술품에 대한 애착과 함께 당시의 시대상과 수집방식 등의 일면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내용이기 때문에 요약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백자청화채동채금강산형연적(白磁靑畵彩銅彩金剛山形硯滴)>, 높이 5寸 4分, 함석태 소장, 『조선고적도보』 15(1935), 도 6615. | <진홍백자금강산모양연적>, 조선(1846년 경), 높이 17.0㎝, 북한 국보, 평양 조선미술박물관. |
함석태는 금강산연적을 지극히 아껴 꼭 싸가지고 다니다가 일본에 갈 때도 반드시 휴대하고 다녔다. 부산에서 연락선을 탈 때 일본 형사에 의해 추궁을 당했지만 여러 번 왕래하는 동안에 소문이 나서 금강산 연적만은 검사를 받지 않을 정도로 잘 알려지게 되었다. (박병래, 『도자여적(陶磁餘滴)』)
어느 날 원남동 부근을 거닐던 함석태는 달구지에 실린 이삿짐 끝에 메어 달린 옛날 장롱을 보고 달구지가 들어가는 집을 끝까지 쫓아갔다. 그는 목공예에도 상당한 식견이 있었을 뿐 아니라 그 장을 골동을 넣어두는 장으로 쓸 심산이었다. 장롱의 주인이 쌀가게를 차리자 매일 꼭 한 되씩 쌀을 사던 함석태는 미심쩍게 여기는 주인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그 장롱을 자기에게 달라고 하였다. 절대로 안된다고 우기는 주인에게 삼월(三越)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의 신식 양복장을 사다주고 얻어왔다. (이태준, 「도변야화(陶邊夜話)」) |
이밖에 서울 광화문 네거리 동북부에 있는 비각(碑閣: 大韓帝國大皇帝寶齡望六旬御極四十年稱慶紀念碑閣)의 철제문도 함석태가 보관했었다. 이 비는 대한제국의 대황제 곧 고종황제의 연세가 육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왕위에 오른 지 40년이 되는 경사를 기념해서 세운 비인데, 이태준의 표현에 따르면 "길을 넓히느라고 뜯어 경매할 제" 함석태가 경매로 낙찰 받은 것으로 "진고개 부호가 거액으로 탐내 왔으나 굳게 보관해 온 것"이다. 이처럼 열성스럽게 고미술품을 수집하던 함석태는 광복 직전 일제에 의한 소개령에 의해 1944년 9월 또는 10월 경 고미술품을 모두 추려 가지고 고향으로 피신하였다. 손자 함각은 함석태가 가지고 온 고미술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염부산수문서판(染付山水文書版)>, 길이 6寸, 폭 4寸 3分, 두께 5分 2厘, 함석태 소장,
『조선고적도보』 15, 도 6566.
소개령으로 고향에 오셨을 때도 내가 알 수 없는 물건들을 무려 세 차나 싣고 왔는데,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게 골동품이었던 것 같다. |
광복 이후 함석태는 맏손자 완(琓)에게 황해도 해주에 들러 먼저 월남하겠으니 뒤따라 올 것을 부탁하고 부인과 딸을 데리고 먼저 길을 떠났지만 이후의 소식은 알 수 없다. 그가 해주를 월남루트로 택한 것은 배에 가족과 고미술품을 함께 실어 월남하려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