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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4. 치과의사 함석태: 최고의 치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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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치과의사면허 제1호
함석태가 당시로서는 생경한 학문분야인 치의학을 전공으로 선택하게 된 동기는 상세하지 않으나 함각의 인터뷰에서 볼 수 있듯 경제적으로 대단히 유복한 가정환경과 사회사업에 힘쓰는 등 '개화'한 집안이었기에 선진 학문 분야를 습득하는 데에 큰 거부감이 없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함석태는 일본 최초의 치과의학교인 일본치과의학전문학교(현 일본치과대학)를 1912년에 졸업하고 1913년 말까지 동경에 머문 후 귀국하였고 1914년 2월 5일 조선총독부 치과의사면허 제1호로 등록되었다.


구강위생의 필요성을 강조한 함석태의 글:
「口腔衛生; 緊急한 要件, 保健問題는 兒童衛生으로부터, 兒童衛生은 口腔衛生으로부터」,
『東亞日報』, 1924년 2. 11. 4면

함석태는 1914년 6월 19일 경 서울 삼각정(三角町) 1번지 옛 제창국(濟昌局) 자리 동쪽에 한성치과의원을 신축하고 개업하였다. 1914년에 개업한 함석태는 1919년 이후 일본에 유학한 다른 치과의사들이 귀국하여 개업하기까지 일본인들이 언급하는 바와 같이 '독무대'로 활동하였다. 함석태의 손자 함각은 한성치과의원을 다음과 같이 기억하였다.

치과는 삼각동에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아주 요충지였다. 지금의 청계천 고가도로가 끝나고 광교로 연결되는 그 부근이었을 것이다. 건물은 3층 목조건물이었는데 건물도 크고 좋았다.

이 내용은 백자수집가로 유명한 박병래의 "그는(함석태) 삼각동에서 개업을 했었으니까 지금 을지로 입구에서 청계천 고가도로 어귀 근처로 들어가는 부근의 어디쯤 된다"는 증언과 부합된다.


총독부가 신뢰한 치과의사
함석태는 보철 등 치과일반을 보면서 구강외과에 주력하였고 1925년에는 경성치과의학교에서 첫 졸업생이 배출되자 한국인 치과의사 7명을 규합하여 한성치과의사회를 설립하였고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일본인 주도로 이루어진 조선치과의사회에서 한국인이 소외되는 현실에서 한국인만의 한성치과의사회를 조직한 것인데 이러한 경향도 그의 민족의식에 의한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함석태는 충치예방 등에 대한 글을 『동아일보』에 기고하고 치아 위생에 대한 좌담회 등에 참여하는 등 특히 구강위생계몽활동에 힘을 쏟았다.


함석태가 안창호 선생을 치료했다는 내용을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
「醫師가 出張 留置場서 治療, 함석태의사가 입치에 전력 安昌浩의 最近消息」,
『동아일보』, 1932. 7. 12. 4면.

일제강점기 치과의사로서의 함석태의 위상은 독립운동가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1878-1938)와 김약수(金若水: 1893-1964) 등의 치과 치료를 했다는 점으로도 알 수 있다. 안창호 선생과 함께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이자 제헌국회 부의장을 지낸 후 월북한 김약수의 치과치료를 그가 담당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함석태는 최초의 치과의사로서 유명했던 것만이 아니고 조선총독부가 신뢰할 수 있는 치과의사였음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일부에서는 순종과 순종비도 함석태의 한성치과의원에서 치료를 받았다고 하였지만 아직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편집 스마트K
업데이트 2024.11.12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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