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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7. 고유섭의 골동관 1-1 「만근(輓近)의 골동수집 - 빈번한 부장품의 도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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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又玄) 고유섭(高裕燮: 1905∼1944)은 우리나라 근대 미학 및 미술사의 비조(鼻祖)라 일컬어진다. 고유섭은 인천 출신으로 1925년 서울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철학과에서 미학과 미술사를 전공하였다. 1930년 졸업 후 경성제국대학 미학연구실의 조수(현재의 조교)로 근무하면서 국내의 중요한 고대 미술품의 조사와 연구에 힘썼다.


우현 고유섭 선생 유영(遺影)

 

  1933년 3월 개성부립박물관 관장으로 부임하여 10여 년간 박물관의 발전을 위하여 노력하는 한편 우리 미술사 연구에 주력하였다. 주요 논문은 대부분 이 시기에 발표되었으며, 고려의 고도(古都)였던 개성의 유적과 유물에도 많은 관심을 나타내었다. 이 때 그의 미술사 연구의 초점의 하나는 전국에 분포하고 있는 석탑에 대한 연구였다. 삼국 중 백제와 신라, 통일신라 때의 석탑들을 양식론에 입각하여 체계화하였다. 그가 죽은 뒤 연구결과를 모아 책으로 간행한 것이 『한국탑파(韓國塔婆)의 연구』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의 고대 조형(造形)을 질과 양으로 대표하는 탑파에 관한 최초의 학술적 논의이며, 우리 미술사 연구에서 처음 보는 역작이다. 이밖에도 우리 미술사 전반에 관한 글을 꾸준히 발표하였고, 미술사 기초 자료 수집에도 남다른 열의를 보였으나 1944년 40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하였다.

  그가 생전에 신문이나 잡지에 발표한 글들은 죽은 뒤 제자이던 황수영(黃壽永)·진홍섭(秦弘燮)이 『한국미술사급미학논고(韓國美術史及美學論攷)』(1963)·『조선화론집성(朝鮮畵論集成)』(1965)·『한국미술문화사논총(韓國美術文化史論叢)』(1966)·『송도의 고적』(1977) 등으로 간행하였다.


학우와 함께(보성학교 시절)

그는 일제 강점기에 국내에서 우리 미술사와 미학을 본격적으로 수학한 학자이자 우리 미술을 처음으로 학문화한 학자로서 높이 평가된다. 그의 우리 미술사에서의 업적을 기리는 의미에서 ‘우현상(又玄賞)’을 제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유섭은 『동아일보』 1936년 4월 14일-16일 3번에 걸쳐 골동수집과 도굴에 관한 글을 연재하였다. 1930년대 조선은 광업권 투기 등으로 황금에 눈이 먼 이른바 '황금광시대'라 불리는 시기로서 고미술품 거래 역시 최고의 호황기였다. 당시 만연한 골동거래와 도굴에 대한 생생한 경험담이 흥미로우며, 미술사학자의 입장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 원문의 한자를 대폭 줄였고, 한글병기를 하였으며 일부 현대문법에 맞게 한 부분도 있다. 편집자의 해설은 [  ] 안에 넣었다.)


고유섭 선생의 스케치.

만근(輓近)의 골동수집
- 빈번한 부장품의 도굴  『동아일보』 1936. 4. 14

천하를 제패하던 초장왕(楚莊王)이 주실(周室)의 전세보정(傳世寶鼎)의 경중을 물었다 하여 '問鼎之輕重'이라는 한 개의 술어가 정(政)□혁(革)□의 야심에 대한 숙어로 사용케 되었다 하는데, 이 고사를 이렇게 해석치 말고 관점을 고쳐서 초장왕이 일찍부터 골동벽(骨董癖)이 있던 이로 보정(寶鼎)에 탐이 나서 그 보정을 얻기 위하여 또는 될 수 있으면 훔쳐만 내오려고 경중을 물었으나 훔쳐 내오기에는 너무 무거웠던 까닭에 조그만치 보정만 훔치려 했던 것이 변하여 크게 천하를 빼앗으려는 마음으로 되었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렇게 보면 애오라지 보정 하나를 귀히 여기다가 군도(群盜)가 봉기하는 춘추전국시대를 현출(現出)시킨 주실의 골동벽도 상당한 것이었다고 할 만하다.
  노자가 "不貴難得之貨하여 使民不爲盜하라[얻기 힘든 재화를 귀하게 여기지 않음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도둑질하지 않게 하라]."고 경구(警句)를 발(發)케된 것도 주실의 이러한 골동벽이 밉살스러워서 시정(時政)을 감히 노골(露骨)로 비난할 수 없으니까 비꼬아 말한 것인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근자에 장정중(蔣正中: 장개석)이 골동을 영국엔가 전질(典質)하고서 수백만원의 차금(借金)으로 정권의 신로를 개척하려 한다는 소식이 떠돈지도 오래었다. 

 


고유섭, 「만근(輓近)의 골동수집」,  『동아일보』 1936. 4. 14.

 

  골동이라면 일본서는 '雅樂多'라 번역하고 조선에서는 어른의 작란(作亂)감으로 아는 모양인데 작란감으로 말미암아 사직이 좌우되고 정권이 오락가락한다면 작란감도 수월한 작란감이 아니요 특히 상술한 바와 같이 상하사오천년을 두고 골동열이 변치 않고 뢰고(牢固)히 유행되고 있다면 그곳에 무슨 필연적 이설(理說)이 있어야 할 것 같지만 필자를 골동의 하나로 취급하려드는 편집자로부터 골동설(骨董說)의 과제를 받기까지 생각도 없이 지났다면 우활(迂闊)도 적지않은 우활이다.


고유섭 인장(印章)

  하여간 초장왕, 장정중의 영향만도 아니겠지만 조선에도 근자에 골동열이 상당히 올라서 도처에 이야깃거리가 생기는 모양이다. 한번은 경북 선산서 자동차를 타려고 그 정류장인 모 일본 내지인 상점에서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가 그 집 주인과 말이 어우러져 내 눈치를 보아가며 하나 둘 꺼내어 보이는 데 모두 고신라(古新羅) 부장품들로 옥류(玉類), 마형대구(馬形帶鉤), 금은장식품(金銀裝飾品) 기타 수월치 않은 물건이 조히 있었다. 묻지 않은 말에 조선 농민이 얻어온 것을 사서 모은 것이라 변명을 하지만 눈치가 자작 도굴까지는 아니 한다 하더라도 □□은 시켜 모을 듯한 자였다. 그 자의 말이 선산(善山)의 고분은 흑판박사(黑板博士)가 도굴을 □□시킨 것이라는 것이다. 어느날 흑판박사가 선산에 와서 고분을 발굴한 것이 기연(起緣)이 되어가지고 고물열(古物熱)이 들어 도굴이 성행하게 되었다는 것이니 일견 춘추필법에 근사한 논리이나 죄상의 전가가 가증스럽기도 하였다.

편집 스마트K
업데이트 2024.11.12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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