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晴福半日」은 함석태가 『文章』 1940년 1월호에 쓴 글이다. 당시 그의 나이는 51세였다. 서예가 손재형, 소설가 이태준, 화가이자 미술평론가인 김용준, 서양화가 길진섭, 배정국 등이 등장하며, 지금은 고급 주택가가 된 성북동의 옛 정취를 느끼게 해준다. 이 글을 통해 함석태의 인문적 교양을 알 수 있음은 물론 근대에 활발히 이루어진 문인, 서예가, 화가들의 교류와 풍류어린 일상을 엿볼 수 있다.
(※ 현대적 표현으로 바꾼 부분이 있으며, 원문의 느낌을 살리기 위하여 한자를 그대로 두었다.)
一年四季의 景物에 對한 感興을 나더러 考第하라면 四景의 風致가 가 各키 좋지 않은바 아니로되 그래도 嚴寒과 苦熱은 冬裘夏葛로도 오히려 괴로운 때이니 春秋兩節을 居中의 上上이라 하겠다.
其中에 아무리 보아도 가을은 男性的이다. 春風이 麗人의 溫情이라 하면 秋月은 文士의 襟度라 할까. 봄은 爭艶에 흐르기 쉬우나 가을은 獨淸에 빼낸다 하겠다. 一塵에도 染치 아니하는 長江의 찬 빛은 澄澈을 天光으로 다투고 秋林의 맑은 맛은 指端에 微雪을 드려다 보는 것 같다.
벼 누르고 魚蟹 살지고 棗柿 붉고 달 밝고 日白霜靑에 楓丹菊黃하여 口味와 睡眠과 淸興을 돋을 대로 돋우는 一年 中에 가장 좋은 때이니 이른바 得意秋이다.
1940년 2월 서울 화신백화점에서 개최된 ‘기원 2천6백년 봉축 명가비장 고서화전람회(紀元二千六百年 奉祝 名家秘藏 古書畵展覽會)’ 안내장 표지와 수장가 부분. 수장가 명단 제일 앞 쪽에 함석태의 이름이 보인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自古로 文章, 英雄, 佳人, 才子 들은 悲傷을 恨하였다. 宋玉의 悲秋賦로부터 李太白의 悲情秋나 濟淵의 秋傷賦 等은 그 뜻을 모르겠다. 넘치는 人生觀을 秋來木葉黃에 부쳐 紅顔이 漸暮하고 白髮이 將至함을 情恨한 觸物의 寓詞가 아닐까 歲去에 人頭白을 奚但秋日 만에 恨하리오. 늙은 것을 恨하려면 一日一時가 새롭고 또 搖落蕭瑟한 것을 悲傷하려면 風雪深冬을 어찌할까.
그러므로 潘岳의 秋興賦나 梁元帝의 秋德賦나 表淑의 秋晴賦도 없는 바는 아니다. 人生一世를 어찌 草生一秋에 비치워 恨하리오. 더욱 朝鮮은 沃野千里의 天府廣野는 없다하더라도 錦繡江山을 자랑하는 農村國의 秋景으로써 一籌를 아니 둘 수 없다.
고급 주택가가 된 현재의 서울시 성북구 성북동.
성북동에 위치한 상허(尙虛) 이태준(李泰俊: 1904-?)의 고택인 수연산방(壽硯山房) 입구.
요즘과 같이 日白風淸한 때에 한번 발걸음을 郊外에 내놓으면 山紫水明만이 秋景일뿐 아니라 鷄黍 향기로운 農村의 여기저기 唐紅苦草 말리는 붉은 지붕과 雜草는 야위어도 홀로 살지고 香氣높은 野菊을 야윈 풀과 함께 묶어 걸머지고 가는 樵童들의 風情이나 山寺에 尼僧이 野菊의 멧가지를 함부로 모아잡아 佛壇에 고여 놓은 모양은 아무리 보아도 가을 朝鮮의 一幅畵題이다.
朝鮮의 가을 氣候는 四時 中에 特別히 오랜 것도 우리가 가진 淸福이라 하겠다. 都市生活의 疲勞를 풀 겸 每日曜日에 竹杖芒鞋로 訪山尋水에 一日의 消暢을 얻기로는 一年 中에 第一 絶好한 氣候이다.
수연산방 안 의 ‘문향루(聞香樓)’.
이태준은 1933년부터 46년까지 문향루에 살면서 『달밤』, 『돌다리』, 『왕자 호동』 등 주옥같은 작품을
저술하였기에, 이곳을 이태준 문학의 산실이라 부른다.
바로 지난 十月 二十九日은 大空一碧한 日曜日이었다. 이 날의 好晴을 타서 素荃 孫在馨氏와 같이 옛날은 高陽郡 城北里 上城北屯이오, 지금은 京城府 城北町에 新精舍를 落成한 尙虛 李泰俊氏의 幽居를 叩하였다.
尙虛는 所幹이 있어서 外出할 터이니 午後 五時에 찾아달라는 前날의 約束이었으나 景趣에 바쁜 두 사람의 일이라 두 時間 前에 城北洞 재를 넘어 개울을 끼고 물풀 길을 찾았다.
稀罕한 旱災에 溪流가 涸渴된 것은 無怪한 일이나 없던 高層建物이 點出하는 것만은 舊時容이 아니다. 물 없는 내는 秋景에 加하여 郊外情趣로 볼 수 있으나 벌건 벽돌 풀은 페인트와 鐵條網을 얽어 막은 것은 風致를 돋는 所爲가 아니다. 그러므로 建物이 늘어 갈수록 自然이란 破壞되는 것을 알겠다.
前 날은 上城北屯於口로부터 淸流를 거슬러 半淸門을 올라 三淸洞으로 넘는 길에 兩三茅屋의 村家風情과 아울러 蒼石老苔에 笻履의 痕迹을 찼던 것이 이곳을 가는 風致이었다던 말은 素荃보고 다시금 뇌이며 三人台 옛 터에 怡然이 걸음을 멈추었다.
김용준의 성북동 노시산방(1930년대 말-1940년대 초) 사진.
왼편에 앉아있는 사람이 김용준, 오른쪽 가운데 앉아 있는 사람이 김용준의 부인 진숙경이다.
台後一隅에 朱實이 方濃한 數株老柿 사이로 羊腸石遙이 알맞게 굽어진 곳에 閑寂히 닫혀있는 一閣門이 보였다. 主人 牛山 金瑢俊氏의 山莊이다. 古拙한 門만 보아도 누구든지 지나던 사람은 門札이라도 한번 보고 가려 할 것이어늘 더욱 黃葉朱實에 맑은 山陰에 萬朶花紅을 이룬 風霜한 맛은 아무리 보아도 紅柿山莊이라고 불러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