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5년 8월에 간행된 잡지 『삼천리』 제7권 제7호 「文藝-民藝隨錄」에 사학자이자 민속학자인 손진태(孫晉泰: 1900-?)의 글이 실렸다. 손진태의 본관은 밀양(密陽), 호는 남창(南滄)이다. 경상남도 동래에서 출생하였고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문학부 사학과에서 역사학과 사회학을 전공하였다. 송석하(宋錫夏)·정인섭(鄭寅燮) 등과 함께 조선민속학회를 조직하고 한국 최초의 민속학회지인 『조선민속(朝鮮民俗)』을 간행하였다. 1934년 진단학회(震檀學會)의 창설에 참여하였고, 보성전문 강사·전임강사·도서관장, 광복 이후에는 서울대학교 문리대 사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사범대 학장, 문리대 학장을 거쳐 문교부차관 겸 편수국장을 맡았다. 1930년대 후반 “현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민족이 살아나갈 길을 명시하는 학문”을 찾아 민속학에서 한국사학으로 전환하였으며, 8·15광복 이후 ‘신민족주의사관(新民族主義史觀)’을 제창하여 민족 내부의 균등과 단결, 그리고 그에 기반한 민족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한국사를 서술하였다. 1950년 6·25전쟁 때 납북되어 그 해 사망하였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확인되지 않았다. 이 글을 통해 손진태의 소박한 민예관을 볼 수 있으며, 30년대를 중심으로 한 일제시기의 고미술품 인식도 엿볼 수 있다. 내용 가운데 수장가 함석태에 대한 언급도 있다.(현대 문법에 맞게 고친 부분이 있다.)
'경복궁 총독부박물관 본관', 일제시기의 사진엽서
내가 우리의 도자기며 일반 민간공예품에 취미를 가지게 된 것은 겨우 7, 8년 전 부터이었다. 동경에 있을때 小山君이라는 친구와 자주 상종하게 되었는데 그는 남달리 조선의 陶磁를 자랑하였다.
京都 大德寺 孤蓬庵에 잇는 그들의 소위 大井戶茶碗 또는 喜兵衛茶碗이라는 조선사발 한 개가 지금 2, 30만원으로 평가된다는 말을 듣고 어찌 놀라지 아니하였으랴. 小山君은 陶磁전문가이오 현재 『陶磁』라는 잡지의 主幹이다. 나는 그의 말을 信聽하지 아니치 못하였다. 그 사발이 불과 3백여년전의 것이라고 하엿다.
나는 그 뒤 小山君의 덕으로 약간 조선 陶磁에 관심을 가지게 되여 틈만 있으면 東京帝室博物館 陶磁전람회, 歸鮮하면 昌慶苑박물관, 충독부박물관 등을 분주히 돌아다녔다. 그 덕택으로 지금은 多少의 안목을 가지게 되었다.
'본정(本町: 충무로) 야경', 일제시기의 사진엽서
이렇게 조금 눈을 뜨고 보니 한탄되는 것은 우리네들은 왜 우리의 손으로 된 우리의 미술이나 공예품을 사랑할 줄 모르는가 하는 마음이다.
書畵같은 것은 예로부터 애호가가 있었지만 陶磁에 이르러서는 과거에는 없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오, 지금에 있어서도 그 애호가는 10指로서 족히 헤일 것 같은 형편이다.
더구나 민간공예품에 이르러서는 전연 무관심할 뿐만 안이라 도리혀 이것을 천대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상이다.
三角町 咸錫泰씨가 民藝品 중에도 특히 목공품을 수집하신다는 말을 葦滄선생으로부터 듣고 한 번 찾아 갔었으나 불행히 만나지 못하였다.
왜 우리는 陶磁나 기타 민간공예품을 사랑하여야 될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우리의 祖先들이 남겨주신 유물이니까. 우리의 지낸 날의 문화며 사회를 연구하는 대 있어 필요한 참고품인 까닭에. 美術인 까닭에.
일전 경성미술구락부에서 경매가 있다기에 가서 보니 鳳凰丸紋象嵌 高麗花甁(저네들은 花甁이라 하나 실상인즉 양념단지로나 꿀단지 같은 것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한 개가 2천 3백원에 팔렸다.
일제시기의 경성 중심부와 북한산
다시 가만히 생각하여보면 이러한 골동취미는 말하자면 귀족적이다. 나는 지금 이 화병과 우리농가의 바가지를 비교하여 보겠다. 전자는 2천 3백원 후자는 단 10전짜리도 못된다. 그러나 우리의 생활에 있어 그 어느 것이 緊且重할가. 우리의 것이 남의 손으로 갔다는 것은 애석한 일이나 우리농민의 실내에 고려청자 봉황상감의 화병이 없은들 생활에 관계될 바 무엇이랴 마는 그들의 주방에서 바가지를 빼앗아 보라.
우리는 흔히 차중에서나 경성역에서 바가지를 찬 만주 기타의 이주동포를 본다. 어떤 이는 이것을 민족의 羞恥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민족의 수치라고 생 각하는 그러한 마음은 보다 더 민족의 치욕이 되는 것이다. 왜? 그것은 우리 농민대중의 생활에 대한 인식의 결핍과 참된 민족애의 부족을 폭로하는 심정임으로 써이다.
그들에게는 바가지처럼 긴요한 것이 없다. 특히 여행에 있어 더욱 필요하다. 식품으로 水杯로 褓로 밤으론 베개로. 한 개로서 능히 수십 종의 기물을 대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바가지를 사랑한다. 참으로 사랑할 줄 안다. 이 바가지를 능히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참으로 조선을 사랑할 줄 아는 자이다.
가난하다는 것이 무엇이 그리 수치가 되느뇨. 그것은 일종의 귀족숭배사상이다.
'경성(京城: 서울)의 주택가', 일제시기의 사진엽서
일전에 나는 어떤 고물상에서 2전짜리 고불통 한 개를 샀다. 고불통이란 것은 함경도방언으로 그 농민들이 쓰는 담뱃대꼭지를 가르침이다. 오직 꼭지뿐이오 물부리도 없고 꼭지에 연관을 꽂아서 쓰는 극히 素僕한 것이다. 이 고불통이야말로 우리들의 생활을 여실히 말하여 줄 뿐 안이라 우리에게 커다란 교훈과 편달을 주는 민예품이다. 萬千의 訓辭보다 千百의 경제학자들의 논설에서보다 나는 이 고불통 한 개에서 더욱 큰 충동을 느꼈다.
우리는 만사에 있어 더욱이 우리들의 경제생활에 있어 이 고불통 주의를 써야 할 것이다. 우리가 고가의 외래사치품을 쓸 이유가 어디 있으며 그것을 씀으로써 무슨 자랑이 되며 문화발전과 민족사회에 기여 하는 바 무엇이 잇느뇨. 부화한 귀족적 臭味를 버리라. 고불통을 물고 일을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