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장품 처리 유형
현 단계에서 우리나라 근대의 고미술품 수장가들의 수장 취향 등을 온전히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수장품의 전모는 물론 대략적인 내용도 충분히 조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장택상⋅이병직은 도자와 서화, 오봉빈⋅박창훈은 서화, 박병래는 도자 수집에 전념했다는 사실과 이들에 비하여 다소 연하인 전형필은 서화, 도자, 전적 등 고미술품 전반을 망라하는 수장경향을 보였음은 알려진 바이다. 필자는 한국 근대의 고미술품 수장가를 수장 및 처리 방식에 따라 ① 전형필과 같이 수장하면 절대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 유형, ② 장택상⋅손재형과 같이 수장하였다가 어쩔 수 없는 사정에 의해 조금씩 유출되다가 결국 모두 흩어진 유형, ③ 박창훈과 같이 다량 수집했다가 한꺼번에 모두 처분해 버리는 유형으로 나눈 바 있다. 여기에 또 다른 하나의 유형으로 소중히 수집한 고미술품을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전량 몰수 또는 강탈당한 함석태의 경우를 들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함석태 구장(舊藏), <染付龍形水滴(청화백자용모양연적)>, 높이 2촌 9분, 구경 3촌 7분,
『조선고적도보』 14, 도 6511
고미술품 수장가로서의 함석태
이번 글에서는 고미술품 수장가로서의 함석태의 일생을 요약한 후 앞으로의 방향을 살피는 것으로 맺음말에 대신하고자 한다. 함석태는 한국 최초의 치과의사라는 명예로운 기록 외에 '小物珍品大王'이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많은 고미술품을 소장한 일제강점기 굴지의 고미술품 수장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일제강점기 말인 1944년 9월 또는 10월 경 함석태는 일제의 소개령에 따라 자신의 소장품을 모두 세 대의 차에 싣고 고향인 평안북도 영변으로 가서 광복을 맞이하였다. 황해도 해주를 거쳐 월남하려다 실패한 함석태의 이후의 소식은 알 수 없다. 아마도 해주에서 배를 이용하여 가족들과 고미술품을 함께 가져오려다 실패한 듯하다. 이들 가운데 사진으로 나마 전해지는 것은 『조선고적도보』의 15점, 『조선명보전람회도록』과 평양 조선미술박물관 소장 9점인데 중복된 것을 제외하면 도자기 15점, 회화 4점에 불과하다. 근현대 격동의 시기를 거치면서 많은 수장가들의 소장품들이 그 소재조차 알 수 없게 된 경우가 많은데 함석태의 소장품 역시 비극적인 운명을 맞게 된 것이다.
함석태 구장(舊藏), <染付山水文盌(청화백자산수문주발)>, 높이 5촌 1분, 구경 1척 2촌 6분,
『조선고적도보』 14, 도 6396
현재 전해오는 그의 소장품 가운데에는 북한의 국보로 지정된 <백자금강산연적> 등을 위시한 수작들이 있다. 이들 작품을 통해 함석태의 뛰어난 감식안, 심미안을 느낄 수 있으며 특히 소품, 진기한 모양의 고미술품에 매료되었던 그의 성향과 기질을 확인할 수 있다. 함석태야말로 경제적 타산을 도외시하고 "정혼(精魂)을 기울여" 고미술품을 수집한 모범적인 수장가의 한 사람으로 꼽을 수 있을 듯하다. 그와 교유한 여러 고미술품 수집가들은 물론 이태준 등 문인과의 교유와 문인들의 고완(古翫) 풍조 등에 대한 접근은 1930년대 문화계의 일면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작업으로서 이 방면에 대한 연구는 차후의 과제로 삼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