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晴福半日」(함석태가 『文章』 1940년 1월호에 쓴 글) 계속
勿論 牛山은 風流畵家임을 모른바 아니로되 보고나니 果然 百聞이 一見을 敵할 수 없다.
門을 들어서니 欣然이 맞아주는 主人의 風貌와 함께 正面에 걸려있는 阮堂古額인 豊士室을 對할 때에 스스로 지금 들어온 門이 斷俗門이 아닌가를 疑心하겠다. 引導하는 대로 豊士室의 손이 되어 正襟敍懷하고 要談 一刻 後에 先客의 人事紹介를 받고 보니 이분은 東京 留學時代부터 令名을 飽聞하던 畵家 吉鎭燮氏로 一面이 如舊하다. 그리하여 두 畵家와 한 書家의 書畵談을 배불리 듣다가 午后 五時가 稍過하여 主人 牛山의 指路로 四人이 같이 尙虛邸로 가는 도중에 最近 搬移하여 온 同好 裵正國氏의 門前을 지나게 되어 歷訪의 敬意를 表하였더니 主人은 不在中이나 卜宅의 情趣만 보아도 對한듯 싶었다.
『무서록(無序錄)』, 이태준 저, 김용준 장정, 박문서관, 경성, 1941. 9. 5.
김용준은 이태준과 문학과 미술에 대한 안목을 나누면서 서로 친분관계를 유지하였고,
이태준의 책 다수를 장정하였다.
이태준은 「책」에서 "책은 읽는 것인가? 보는 것인가? 어루만지는 것인가? 하면 다 되는 것이 책이다. 책은 읽기만 하는 것이라면 그건 책에게 너무 가혹하고 원초적인 평가다. 의복이나 주택은 보온만을 위한 세기(世紀)는 벌써 아니다. 육체를 위해서도 이미 그렇거든 하물며 감정의, 정신의, 사상의 의복이요 주택인 책에 있어서랴!"라고 하여 장정에 대한 남다른 생각을 드러냈다.
담이 낮고 뜰이 넓은 한 편 가에 정갈한 數間茅屋에 고요히 窓이 닫혀 있었다. 百畝庭中의 이 草堂主人을 만나 보기 어려울 것을 首肯하며 一閣門을 나서서 牛山의 가리키는 곳이 遠景이나마 尙虛의 精舍라 한다.
성북동 노시산방 뒷동산에서. 1930년대 말-1940년대 초.
가운데 앉아있는 사람이 김용준, 그 왼쪽에 서 있는 사람이 부인 진숙경이다.
지금껏 恣飽한 景致와 邂逅한 機會는 豫期치 않았던 收穫이나 남은 遺憾은 오늘이 文人의 노다지村에 왔다가 遊賞을 더 못하고 山陰이 멀어가니 "夕陽이 無限好나 只是近黃昏"을 恨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 牛山이 가리키는 곳은 내가 數十年前부터 나의 親友이던 城北葡萄園主 鶴南과 같이 사랑하지 마지않던 上城北屯 初入에 惟一한 奇巖峭絶의 斷崖下에 平坦한 廣場이었다. 只今 다시 보아도 이 洞府中의 景致로는 王座라 하겠다.
상허 이태준의 '수연산방(壽硯山房)' 당호
長垣을 앞으로 南西庭을 널리 트이고 南向大廳을 東으로 꺾은 樓閣의 'ㄱ'字型 輪奐美는 틀림없이 雅淡한 李朝砂器 硯滴을 擴大한 感이다. 新築한 建物이지만 새 材木의 나무 내는 나지 않고 새 흙내만 향기롭다. 建築의 苦心談을 들으니 古材木을 낱낱이 골라 되깎이 하여 지었다 한다. 景致뿐 아니라 建物로도 首位갈 것이다. 평소 謙黙家인 尙虛로도 材料鳩集과 工匠使用의 苦心談을 娓娓不倦하는 것을 보아 알겠다.
김용준, <수향산방(樹鄕山房) 전경>, 1944, 종이에 수묵과 담채, 24×32㎝, 환기미술관.
김용준은 1944년에 성북동 자택 '노시산방(老柿山房: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 65-2)을 김환기에게 넘겨주고 경기도 양주군 의정부읍 가능리 고든골(直洞)로 이주, 그곳의 집을 '반야초당(半野草堂)'이라 이름짓고 살았다. 김환기는 노시산방을 자신의 호 수화(樹話)와 부인 김향안(金鄕岸)의 이름에서 한 자씩 따서 '수향산방'이라 지었다.
"근원선생의 취미를 살려서 손수 운치있게 꾸미신 한옥, 안방, 대청, 건넌방, 안방으로 붙은 부엌, 아랫방, 광으로 된 단순한 'ㄱ'자집. 다만 건넌방에 누마루를 달아서 사랑채의 구실을 했고 방마다 옛날 창문짝들을 구해서 구해 맞춘 정도로 집은 빈약했으나 이백 평 남짓 되는 양지바른 산마루에 집에 붙은 개울이 있고, 여러 그루의 감나무와 대추나무가 있는 후원과 앞마당엔 괴석을 배치해서 풍란을 꽃피게 하며, 여름엔 파초가 잎을 펴게 온실도 만들어졌고, 운치있게 쌓아올린 돌담장에는 앵두와 개나리를 피웠다. 앞마당 층계를 내려가면 우물가엔 목련이 피었다."_ 김향안
西庭에 따로 있는 一間草亭인 客室에 案內를 받고 幽賞을 未幾에 高談이 轉淸하는 中 술이 나오고 珍羞盛饌이 나와 醉飽를 마음대로 하고 俗腸을 맑혔다. '램프' 燈盞 아래에서도 洞景이 궁금하여 幽靜 속을 내다보니 不易收의 景은 不易收의 幕으로 잠가버리고 바람소리 候蟲소리만 들리더니 落葉에 발자취와 함께 문득 들어서는 이는 三叩하고 볼 줄 알았던 草堂主人 裵正國氏가 黑夜에 塵客을 찾아 來臨한 것이다.
성북동 어귀. 중앙의 나무 사이에 있는 2층 흰 건물이 간송미술관이다.
밤은 더욱 조용하나 淸談은 더욱 風發하여 案上群書와 干瓷萬畵를 次第로 鑑賞하다가 子正이 正近하여 洞口橋邊에서 三人과 三人은 作別하고 재를 넘어 불 밝은 苦海로 向하였다.
(己卯十一月十日: '己卯'는 1939년이다. 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