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연재부터는 치과의사 함석태(咸錫泰: 1889-?)의 일생과 수장에 대하여 연재하고자 한다. 1930-40년 당시 대표적인 한국인 수장가 가운데 한 사람인 함석태는 우리나라 치과에 관한한 최초의 기록을 섭렵한 인물이다. 한국인 최초의 치과의사이자 한국인 최초의 치과 개업의인 함석태는 당시 주요한 고미술품 수집가인 장택상, 윤치영, 한상억, 이한복, 박병래 및 문학가 이태준 등과 교유하였다.
함석태는 한국 최초의 치과의사라는 명예로운 기록 외에 '小物珍品大王'이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진기한 도자기 및 공예품을 많이 소장하였다. 일제시기 말인 1944년 일제의 소개령에 따라 자신의 수장품을 모두 차에 싣고 고향인 평안북도로 가서 광복을 맞이하였다가 월남에 실패한 함석태의 이후의 소식은 알 수 없다. 아마도 황해도 해주에서 배를 이용하여 가족들과 고미술품을 함께 가져오려다 실패한 듯하다. 함석태의 수장품 가운데 현재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은 도자기 15점, 회화 4점 뿐이다. 근현대 격동의 시기를 거치면서 우리나라의 중요한 수장가들의 수장품들이 그 소재조차 알 수 없게 된 경우가 많은데 함석태의 수장품 역시 비극적인 운명을 맞게 된 것이다.
한국인 최초의 치과의사 함석태(1899-?) | 함석태 구장(舊藏), <진홍백자금강산모양연적>, 조선(1846년 경), 높이 17.0㎝, 북한 국보, 평양 조선미술박물관. |
최초의 한국인 치과의사
함석태는 한국인 최초로 정규교육을 받은 후 제1호 면허를 받은 치과의사이자 최초의 치과 개업의(1914)였다. 함석태 이전에도 대한자강회 회원이던 김영재(金英哉)가 '1906년 일본의 치과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해 치과를 처음 문 열었다'(태극학보, 1908년)는 기록이 있지만 실제 개원 여부를 알 수 있는 자료는 남아 있는 게 없다. 미국으로 유학 간 한성외국어학교 출신 홍윌슨은 1916년 미국에서 개원했다. 함석태에 이어 1917년 일본에서 공부한 한동찬이 두 번째로 평양에서 개원했다. 치과의사로서의 함석태의 일생과 활동 등에 대해서는 의사학(醫史學) 연구자 등에 의하여 여러 차례 다루어진 바 있다.
∘ 이한수, 「한국 최초의 치과의사 함석태」『이한수치학박물지』, 석암사, 1976
∘ ______, 「한국인 최초의 정규 치과의사」, 『한국치학사』, 서울대학교 출판부, 1988
∘ 기창덕, 「최초의 한국인 치과의사 함석태 선생(1989-)」, 『대한치과의사협회지』 1993, 9
∘ 신재의, 「함석태 연구」, 『대한치과의사협회지』 2003, 6
이밖에 치과임상 편집부에서 "한국치의학사의 정립을 위한 시도 - 한국 치의학 100년의 재조명"을 1985년 2-4월호에 3회에 걸쳐 연재하였는데, 이 기사를 본 함석태의 손자 함각의 제보에 의하여 「최초의 치과의사 함석태 스토리」와 「함석태를 말한다 - 손자 珏씨와의 인터뷰」가 『치과임상』 1985년 6월호 23-29쪽에 게재되었다.
「조선중국명작고서화전람회」(社告), 『동아일보』, 1934. 6. 22. 3면.
장택상, 이병직, 김찬영, 김은호, 박창훈, 김영진, 김용진, 이한복 등
당대를 대표하는 수장가들 속에 함석태의 이름이 다섯 번째로 보인다.
평안북도 영변군 출신인 함석태는 그의 부친 함영택이 성균관 진사와 의관(議官)을 지냈다고 전하는 것으로 보면 지방의 향반(鄕班) 계층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문과방목'에서 함영택은 찾을 수 없다. 함영택이 성균관 진사 등을 지냈다고 하는 것은 실제의 사실이라기보다 지역의 유지라는 의미 정도로 받아들여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치과임상 편집팀과의 인터뷰에서 함석태의 손자 함각은 "가세(家勢)는 어느 정도 였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대단한 부호였음에 틀림없다. 소작을 주는 전토도 많아서 고향에서는 남의 땅을 밟지 않고 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증조부 함진사(함영택)는 재산이 많은 만큼 학교도 세우고 교회도 세우는 등 소위 '사회사업'도 많이 하셨다고 들었다. 조부 함석태 선생이 일본에 유학까지 할 수 있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