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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2. 치과의사 함석태:「공예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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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예미」는 함석태가 1939년 9월에 간행된 『文章』 제1권 제8호에 쓴 글로서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이 글을 통해 함석태의 고미술품 특히 조선 도자기, 민속품 등에 대한 애정을 확인할 수 있다. 아울러 1930년대 당시 한국에서 유행한 다도(茶道)에의 관심을 볼 수 있으며 명치유신, 유학, 주자학, 양명학 등을 중심으로 한일문화와 미술의 특징을 설명하는 대목은 흥미롭다. 공예미를 강조하고 조선미술을 부정하는 경향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의 민예관과 상통하는 느낌을 준다.
(※ 현대적 표현으로 바꾼 부분이 있으며, 원문의 느낌을 살리기 위하여 한자를 그대로 두었다.) 


함석태 구장(舊藏), <染付蝙蝠灰皿(청화백자박쥐무늬대접)>, 높이 2촌 7분, 구경 5촌 5리,
『조선고적도보』 15, 도 6565.

看板은 낡아 찌들고 古色이 넘치여 지나가는 손의 世情에 맞기 어려우나 業緣에 깊은 몸이 날마다 掃地開門하고 집을 지키고 있어서 오는 사람을 對하는 것이 本來의 業務인 나로서는 自然히 外界와 接觸이 멀고 이러한 囹圄生活이 어느덧 二十有餘年의 긴 동안이니 在家二十年에 維摩不二禪을 찾으려는 高師大德은 못될망정 君子는 遊道樂而忘憂의 格으로 때로는 忙余의 한 煩惱를 느낄 적마다 學生時代부터 좋아하던 낡은 書籍을 펴놓고 或은 古今事를 헤어보며 或은 古今人을 저울질하여보면 是非善惡을 따라 스스로 묵은 不平 悲哀 公憤을 새로히 느끼게 되니 善惡이 皆吾師로 自己에 비치어 省察하여 본다면 一種의 修養이 될른지 모르나 원래 批判이란 어려운 것이라 만약 남을 批評하다가 恩怨 公私를 混同하면 도로혀 小人은 全軀說而忘罪의 格으로 古今人情의 是非煩惱를 되풀이할 뿐일 것이니 차라리 깨끗하게 모든 是非를 떠나고 一切境界를 超越하여 저 無色이 흙과 티끌에 묻혀 있는 옛 朝鮮의 工藝美術의 理解있는 임자가 되어 보고자 하는 것도 또한 猥濫하나마 나의 閑煩惱의 한 끝이었다.

  大體 우리 人類의 古今變遷의 자취를 찾는 데 있어 文字記錄이나 傳說이나 文獻이 다 같이 좋은 歷史가 아닌바 아니지만 옛사람의 純眞이 낳은 工藝美야말로 文字나 傳說을 다 合한 綜合藝術이요 幾千年後 우리의 實質的 歷史이니 假令 三國時代 以來 특히 新羅의 金石彫刻物이나 高麗時代 特히 陶磁器工藝의 獨特한 發達은 現代 科學知識으로도 믿지 못함은 勿論이어니와 同時에 그 時代人類의 文化程度의 尺度가 됨에 있어 史記나 經典에도 똑똑히 실려질 수 없을 微妙한 點까지라도 넉넉히 알아볼 수 있기로는 훨씬 더 貴重한 史實이다.


함석태 구장, <染付雲龍紋皿(청화백자운룡문대접)>, 높이 1촌 2분, 구경 4촌 7분 2리,
『조선고적도보』 15, 도 6541.

  幾千年前 사람의 손으로 빚어낸 솜씨를 幾千年後 今人이 鑑賞하고 어루만져 보는 것은 옛날과 시방이 손을 마주잡고 祖上과 子孫이 웃음을 나누는 듯이 特殊한 感觸과 迫力이 미치어 나는 것이니 呼吸을 서로 바꾸고 震犀를 서로 通하는 實感을 느끼며 痛哭古人의 새정을 자아냄도 여기서 지날 것이 없다.
  吳宮花草는 埋幽徑이요 晉代衣冠은 成故邱하여 우리 살아있는 歷史가 깊이깊이 땅속에 묻히고 쑥밭이 되어 哀愁를 남길 따름이더니 마침내 예로부터 이른바와 같이 藝術의 聲價는 오랠수록 커지고 묻혀서도 없어지지 않는 眞理로인가 朝鮮 한 모퉁이 땅속에 묻혀있던 몇 조각 高麗磁器가 멀리 世界的 文明을 자랑하는 歐美人의 藝術眼을 놀래게 할 줄이야 어찌 알았스리오. 그리하여 爾今에 우리들도 主人의 자리를 찾아 우리의 자랑임을 외쳐보며 溫故知新의 域을 찾으려는 認識을 갖게 되는 것은 못내 묵고 묵었던 새 기쁨이다.

  줄잡아서 李朝初葉으로부터 中葉에 이르기까지만 하여도 朝鮮의 獨特한 맛을 가진 工藝美術이 많았던 것이니 이를테면 예로부터 愛茶의 癖이 많은 茶人들사이에 거의 生命과 같이 여기는 抹茶器의 井戶茶碗(井戶라는 名稱은 未詳)으로 말하면 當時 우리 朝鮮에서는 알지 못할 村人의 無心히 빚어낸 일종의 民藝品이었다. 이것이 한번 具眼者의 눈에 들어 茶界의 名物로 뽑힌 뒤로는 茶道의 王座를 占하여 온지 이미 四百餘年의 긴 歷史를 가졌을 뿐 아니라 爾今에 와서도 더욱 茶道의 風의 盛行함을 따라 粹人들의 趣味性을 북돋고 所有慾을 자아내어 千金을 散盡하여가며 얻기에 汲汲하여 마지아니한다.

함석태 구장, <染付粉水器(청화백자연적)>,
높이 7분, 길이 1촌, 넓이 9분 7리
『조선고적도보』 15, 도 6498.

함석태 구장, <染付盒(청화백자합)>,
높이 1촌 5분 7리, 길이 1촌 6분 5리
『조선고적도보』 15, 도 6493.

  李朝陶磁器의 이러한 歷史的 事實이 一般에 周知되지 못한 것은 李朝에 와서 佛緣이 멀어짐에 따라 茶風도 遐爾하였을 뿐 아니라 더구나 抹茶의 道는 원래 禪味와 素脫함이 世情에 寡合하여 一般으로 認識할 바 못된 것이다. 이때는 儒敎의 餘風으로 詩酒弄月이 盛行하여 李朝陶磁器 中에 特히 文房四友 酒器諸具나 其他木工 竹物 鐵工 石物 등 어느 것 할 것 없이 各其 特色을 한데 쓸어 잡아 말하면 어디까지나 親切精巧하고 充實雅淡한 中에 一種의 形容하기 어렵고 捕握할 수 없는 맛이 있으니 이것이야 말로 가르치지도 못하고 배울 수도 없는 以心傳心의 手法이요 悠久의 傳統일 뿐이니 이른바 "以無師之智發無作之妙用" 云云의 옛 句로써 그 一斑을 말할 따름이다.
  李朝陶磁器가 特히 文人 茶客의 情趣를 울리는 것도 이것 때문이니 그 精巧한 便으로 보면 專門 陶工의 力作이고 그 雅致의 點으로 보면 無名閑士의 手藝인 것 같은 이 두 極致를 서로 쓸어 잡아 한데 調和하여 固有한 個性味를 맛있게 表現한 솜씨를 보면 個個가 創作이고 이 時代의 特象임을 못내 자랑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함석태 구장, <染付小甁(청화백자소병)>, 높이 1촌 6분 2리, 구경 5분 3리, 동경(胴徑) 1촌 3분 5리,
『조선고적도보』 15, 도 6505.

  그렇지만 㤼蓮盛衰가 輪廻無常함을 어찌 알리요. 어느 듯이 자랑의 精華가 過去 묵은 자취의 자랑으로 돌아가고 말 줄이야. 文化의 움직임이 일로부터 새 자랑의 律動을 그리지 못하고 歲月과 함께 傳統의 솜씨나 만들어오던 精神이 나가 風泡煙雲으로 돌아가고 進化的 生命의 뒷걸음질을 치게 한 것은 이 오로지 朝鮮의 佛敎文化가 끝내 衰殘하고 儒敎가 盛旺하여 實踐敎育을 賤視하고 實地實事에 힘쓰지 아니한 까닭이다. 이와 같이 實行이 없는 곳에는 建設 發展 生活 할 것 없이 무엇이나 虛無한 것이다. 그러나 같은 儒敎로 말하여도 저 明治維新의 精神的 動機라든지 武士道의 精神이 王學의 實踐實行主義(知行合一)의 힘이라고 識者間에서 共認하는 바로서 본다면 朱子學을 正統으로 한 우리 朝鮮儒敎는 '知卽行行卽知'의 原理에 어그러짐이 이제 와서 千里의 差로서 말할 바가 아니오 또 知와 行의 差別을 보더라도 '知易行難'이라 하여 行이 되지 못할 知가 아닌 줄을 모르고 假知를 崇尙하고 實行을 게을리 한 結果 모든 工藝나 繪畵나 有事有物 人事百般의 行爲가 이로부터 뒷걸음한 것이어 朱子學과 陽明學의 兩派 中에 어느 것이 儒敎의 正解이고 아닌 것은 淺學의 함부로 妄評할 바가 못되므로 이만 붓을 던진다.
                                                                       咸錫泰, 「工藝美」, 『文章』 第一卷 第八號, 1939년 9월


 

편집 스마트K
업데이트 2024.11.19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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