맵긴 하지만 칼칼한 느낌에 똑 부러지는 뒤끝. 애초부터 이런 것이 당기는 DNA 같은 것이 있었는가. 그림 속에도 확실하게 그런 분위기가 연출해주는 첨가제(?)가 있다. 대표격이 부벽준이다.
'준皴'은 주름을 친다는 말이다. 먼 산을 바라보면 능선이 겹쳐 선으로 보이고 또 그로 인해 입체감을 느끼게 되는데 그것을 필치로 구사한 것이 준이다. 부벽준斧劈皴은 그중에서 도끼로 쪼갠 듯한 이미지가 연상된다고 붙여졌다.
시작은 북송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조선에도 전해져 일찍부터 잘 구사한 화가가 많았다. 문인화가 이경윤(1545-1611)이 솜씨를 보였고 <달마도>로 유명한 김명국(1600-1663 이후) 그리고 18세기 중반 최고의 인기 화가였던 심사정(1707-1769) 등도 능숙했다. 그중에서 대표급은 단연 이인문(1745-1824 이후)이다.
그는 김홍도의 절친한 친구이자 기교로서는 당대 최고였다. 그는 심지어 붓이 아닌 손톱 끝으로 이를 구사했다. 그렇지만 칼칼하면서도 거칠고 자기주장이 센 분위기는 한결같다. 바둑으로 치면 일수불퇴(一手不退)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쯤처럼 여겨지는데 실제로 후배 화가 장한종(1768-1815 이후)은 그를 가리켜 ‘고집이 무척 셌다’고 했다.(이인문의 1816년작 <지두(指頭)산수도> 혹은 <대부벽준산수도>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