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한 번도 네가 필름을 보지 못한 사람이 구공탄을 보지 못한 사람만큼 생겨났다. 흑백 네가 필름은 더하다. 흑백 필름은 컬러 보다 이전 시대다. 주변에 사진전문가가 있다면 몰라도 아니라면 못 본 게 이상할 게 없다.
흑백 네가 필름은 말 그대로 흑백이 거꾸로다. 얼굴을 찍으며 새까만 머리카락이 필름에는 새하얗게 보인다. 흰 이빨은 새까맣게 나온다. 이런 네가 필름을 보고 있자면 세상이 뒤바꿔진 듯한 묘한 느낌이 든다.
조선에도 그런 경험을 가져다주었을 법한 그림이 있다. 니금 그림이다.(금니라고도 한다) 이는 금분을 아교에 섞어 쓴 것이다. 보통 금색이 잘 보이도록 검은 바탕에 그린다. 비단을 물들여 많이 썼다. 절에서는 곤색 물을 들인 종이도 썼다.
이것도 보고 있으면 세상이 뒤집힌 것처럼 보인다. 하얗게 보이는 하늘이 새까맣다. 계곡물도 마찬가지다. 산이든 나무든 심지어 사람이든 윤곽만 금색이다. 나머지는 무색이다. 즉 색 없음이다. 사물에 색이 없다니. 세상에 어떻게 색 없는 사물이 있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이 세상이 아닌 또 다른 세상인가.
실로 그렇다. 니금으로 그린 산수는 바로 그런 효과를 정통으로 노렸다. 산수야 어차피 눈앞의 자연을 그리는 게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이 세상이 아닌 세상의 자연을 그리는 방법으로 제격일 수밖에
그런데 핸디캡이 있다. 붓 솜씨가 여간하지 않으면 이 세상임이 금방 탄로 난다. 그래서 제아무리 금분에 아교를 섞어 주어도 아무나 그릴 수 없었다. 이 그림의 작자 이징(李澄 1581- 1653이후)이다. 왕족 이경윤의 서자로 출셋길은 화원밖에 없었다. 하지만 솜씨는 당대 최고수였다. 국수(國手)라는 말까지 들었다. 그래서 대폭의 물 들인 비단에 이 세상이 아닌 세상의 한바탕 경치를 그렸다.
말을 타고 가는 사람은 당연히 문인이다. 그는 속세의 티끌을 개울물에 털어버렸다. 그리고 참된 진(眞)의 세상을 향해 아무 욕심 없이 가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원래 그림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이징 작 <니금산수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