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에 이렇게 번듯한 대문간을 가진 집이 있었는가. 지붕이 없는 것으로 보아 대문은 아니다. 중문쯤 돼 보인다. 그런데 규모가 남다르다. 오 척 단구나 지나다니는 시시한 문이 아니다. 사람 머리 위로 곱절이 솟아 있다.
문광(門框)은 조각을 새긴 웅장한 돌기둥을 썼다. 그 사이로 나무로 짠 액방(額枋)을 걸쳤다. 큰 문짝의 아래쪽에는 박쥐문 장식이 보인다. 중문과 이어지는 담장에도 치장을 잘 했다. 상서로운 운문(雲文)을 새겨넣었다.
문 뒤쪽에 무언가 가로막고 있는 게 보인다. 선반 같아 보이는 틀에 식물을 잔뜩 채웠다. 이는 취병(翠甁)이다. 가림막의 일종으로 식물을 써서 병풍처럼 만든 생울타리다. 동궐도(東闕圖)에도 취병이 자주 보인다.
그렇다면 이 그림이 그 언저리 것이냐 하면 그것은 전혀 아니다. 문간에 선 사람의 복장을 보면 모두 중국 옷이다. 그렇다면 여기가 어딘가. 그림 왼쪽에는 강세황(1713-1791)이 쓴 화제가 있다.
그는 이를 아집도(雅集圖)라고 불렀다. 아집도는 운치있는 문인들의 모임을 그린 그림을 말한다. 그런데 강세황 시절 아집도라고 하면 누구나 떠올리는 것이 있다. 서원아집도(西園雅集圖)다. 그는 ‘이전에 본 아집도가 수십 점이나 된다’고 했다. 수십 점은 아마 과장일 것이다. 하지만 크게 유행한 것만은 사실이다.
서원아집도는 북송 문인 왕선의 집에서 열린 모임을 그린 것이다. 그는 북송 영종의 부마였다. 공주와 사이가 나빠 한때 지방으로 쫓겨나기도 했다. 이 모임은 복권된 뒤에 열었다. 저택 서쪽에 있는 정원에서 열었다고 해서 서원아집이 됐다.
이때 소식, 소철 형제, 황정견, 이공린, 미불, 원통대사 등 쟁쟁한 명사 16명이 모였다. 중문 안쪽에 이들이 서화를 휘호하고 악기를 연주하고 토론하는 모습이 하나하나 그려져 있다. 미불은 당시 모습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그림은 꼭 그대로이다. 다른 부분이 있다면 바로 이 문간 장면이다.
서원아집도를 맨 처음 그린 사람은 이공린이다. 하지만 이는 전하지 않는다. 후대에 이공린 그림을 바탕으로 남송의 마원도 그리고, 명의 구영도 그렸다. 강세황이 수십 점 보았다는 그림은 구영류의 그림으로 추정된다. 실제 국립중앙박물관에는 구영이 그렸다고 전하는 그림이 하나 있다. 그런데 이런 그림들을 보면 중문은 전혀 없다.
그렇다면 중문 신(scene)은 어디서 유래했나. 소식의 글이 답이 될 수 있다. 그는 이 모임보다 십 년 앞서 왕선 집에 갔다. 그때 그가 보여주는 소장품을 전부 구경했다. 그리고 명문장 한 편을 지었다.
거기서 그는 ‘사물 가운데 족히 사람을 즐겁게 하고 마음을 빼앗는 것으로 서화만 한 게 없다’라 했다. 또 이런 말도 했다. ‘집 동쪽에 보회당을 짓고 수집한 서화를 보관했다.’ 이것이 유명한 「보회당기(寶繪堂記)」이다.
아치 있는 모임에 서화가 빠질 수 있는가. 그렇다면 당연히 동쪽 보회당에 있는 서화를 서쪽 정원(西園)으로 내갔을 것이다. 대저택이었만큼 동과 서 사이에 근사한 중문 하나쯤 있어도 무방했을 것이다. 그는 황제의 부마가 아니었던가.
중문을 그린 화가 김홍도(1945-1806이후)는 아마도 「보회당기(寶繪堂記)」를 읽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그는 문자속이 든 화가 중 첫 번째로 손꼽혔다. 많은 시의도를 그린 것이 그것을 말해준다. 그랬으므로 중문의 상상도 가능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 장면이 든 원래의 그림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김홍도 작 <서원아집도> 8곡 병풍이다. 이는 1778년에 그린 것이다. 당시 그의 나이 34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