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 <풍속도>병풍 중 한 폭, <비석거리 앞 주막 노파(노방노파(路傍罏婆)> 중 부분
바깥쪽 것은 더 거창하다. 받침에 거북 머리가 분명한 귀부(龜趺)를 놓았다. 머리에도 용이 뒤엉킨 이수(螭首) 장식을 제대로 갖췄다. 내용을 볼작시면 ‘관찰사 김상공 영세불망 선정비(觀察使金相公永世不忘善政碑)’라 했다. 관찰사는 종2품이니 상공이라고 한 것이 맞다. 그런데 그를 영원토록 잊지 않겠다고 했다.
목사와 관찰사의 선정비가 나란히 있는 곳은 요즘으로 치면 도청 소재지다. 관찰사는 도지사고 목사는 도청 소재지의 시장격이다. 그림 위쪽에 실제로 덩실한 관청 건물에 홍살문이 곁들여져 있다. 이런 곳은 조선에 여덟 곳밖에 없다.
그런데 이 고을, 무슨 천복(天福)을 타고났는가. 조선 시대는 지방관은 좀 심하게 말해 백에 아흔 이상은 탐관오리 내지는 악덕 관리 부류에 속한다. 그것은 지방관을 못 돼먹은 사람만 뽑아 보낸 까닭이 아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조선은 직급이 높든 낮든 받는 봉록은 적어도 너무 적었다. 그것만 받아먹어서는 온 식구가 굶어 죽기 딱 알맞았다. 이는 중국 명나라 제도 그대로이다. 참고로 청에 들어 옹정제 때가 되면 양렴전(養廉錢)이란 보너스를 따로 두둑하게 챙겨 주었다. ‘염치를 기르는 돈’이란 말로 받는 쪽에서는 부끄럽기도 하고 체면 깎이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도 없는 게 백번 나았을 텐데 조선에는 끝까지 그런 것은 없었다. 대신 나라에서 정책적으로 몇 년에 한 번씩 지방관으로 나갈 기회를 주었다. 양념전 대신 지방관을 베풀었다고도 할 수 있다.
사정이 이런데 유독 이곳에 온 목사가, 또 관찰사가 오는 족족 선정을 베풀었다니. 요즘같이 감시가 심한 시대에도 엉터리가 수두룩한데. 실제 전라도 어디에는 목이 잘린 선정비가 즐비한 고장이 있다고 한다.
혹시 선정비를 채근하는 풍토가 김홍도 즈음해 새로 유행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대가 김홍도는 어쨌거나 새로운 사회 현상이라면 기막히게 민감했던 풍속 화가였으므로.(김홍도 <풍속도>병풍 중 한 폭, <비석거리 앞 주막 노파(노방노파(路傍罏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