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문, 연광정에서 부벽루, 을밀대를 이르는 대동강변 경치는 조선 시대부터 유명했다. 그외 평양은 여인 미모로도 이름났다.
조선 시대에 일급 임지로 흔히 풍광 좋은 청풍, 단양을 꼽는다. 하지만 이는 중년 관리들의 희망 사항일 뿐. 청풍 사또는 그저 중년의 자리인 종6품이다. 그래서 여러 관직을 거친 노년쯤 되면 누구나 평양 감사 정도는 내심 바랐다.
늘그막에 경치 좋은 고장에서 여색으로 이름난 기생의 환대까지 받을 수 있으니 더 이상의 호강이 없다. 오죽하면 인생사 영광과 즐거움을 한데 모은 평생도(平生圖)에 평양감사 부임 장면이 들어있으랴.
평양은 풍광, 여색 말고도 자랑이 있다. 역사로도 한 대접을 받았다. 평양성은 다른 이름은 기성(箕城). 기자(箕子)가 기자조선을 세웠다는 곳이다. 중국인 기자는 은나라 28대 태정의 셋째아들이다. 걸왕의 동생이다. 걸이 폭정으로 치닫자 미친 척을 하고 몸을 숨겼다. 주 무왕은 나라를 세운 뒤 그를 조선후(朝鮮侯)로 봉했다. 그래서 은나라 유민을 데리고 조선에 건너와 평양에 나라를 세웠다는 것이다.
전설이든 어떻든 조선 왕조로 보면 정통성의 상징이다. 그래서 태조 이래 계속 사람을 보내 묘를 정비하고 비석도 세우고 제사도 지냈다.
조선 후기, 여행의 시대가 열리면서 기자 묘도 관광 명소로 격상(?)했다. 당시 평양은 금강산 다음으로 가보고 싶은 곳. 그런 바람에 부응해 <평양성도>가 수없이 제작됐다. 관찰사의 감영에 내성, 외성 그리고 부벽루, 을밀대, 연광정 따위를 모두 그리려면 적어도 8폭 병풍 정도는 돼야 했다. 당연히 기자 묘도 있었다.
이 병풍은 조선 후기에 유행한 <평양성도> 병풍 가운데 가장 앞선 것이다. 여기에도 기자 묘가 보인다. 보는 사람을 편의를 위해 친절하게 방제(傍題)를 적어 놓았다. 기자 묘의 둥근 봉분에 주변 전각 경치는 사진으로 찍은 관광엽서처럼 사실적이다. 위쪽의 헤진 부분은 왜 여태 수리를 안 했는지 보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런데 요즘 구글로 검색하면 평양 지도에 기자 묘가 안 보인다. 검색 실력이 어설퍼서인가 아니면 조상숭배는 봉건주의 잔재라고 말해온 공산당 정강 때문인가.
이 그림은 송암미술관 소장의 작자미상 <평양성도> 병풍의 일부다. 이 병풍은 근래 보물 제1997호로 지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