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녀와 나무꾼에는 마지막에 나무꾼이 두레박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선녀와 아이들을 재회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것 말고도 두레박에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이야기는 전래 동화에 많이 있다. 그렇다면 어딘가 옛날 사람들에게는 두레박을 타고 하늘에 올라간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이 그림은 조선 그림치고는 색다르게 도르래가 그려져 있다. 이 도르래에 매달린 것은 두레박은 아니다. 또 내려온 것도 허공의 하늘이 아니라 좀 높아 보이는 산봉우리이다.
좀 더 살펴보면 도르래 안쪽에는 커다란 이층누각에 사람이 여럿 보인다. 관악산 꼭대기에 있는 암자의 확대판 같은 사원이 그곳에 있는 듯하다. 그래서 이들을 위해 산 아래에서 먹을 것이랑 일상용품 등을 챙겨 도르래에 실어 올려 보내주는 장면을 그린 것라고도 생각된다.
이치로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흉중구학(胸中丘壑)을 그린 산수화의 본뜻을 고려하면 이런 해석은 어딘가 미진해 보인다.
우리도 그렇지만 중국에서는 고대부터 높은 산은 하늘과 맞닿는다고 여겼다. 대표적으로 곤륜산을 천계의 하도(下都)로 생각했다. 화상석 같은 것을 봐도 뾰족한 봉우리 꼭대기에 신선들이 앉아 한가하게 육박(六博)을 두거나 거문고를 타는 장면이 종종 있다.
이 장면은 인간이 살아가는 무대인 강산이 무한대로 펼쳐져 있는 장대한 광경을 그린 그림의 일부이다. 그 무한대의 공간에는 삶을 영위하는 현장도 있으며 이처럼 신선이 기거하는 신비로운 자연도 함께 있다고 생각했다고 해석해 볼 수 있다. 원래의 큰 그림은 김홍도의 단짝인 산수화가 이인문이 그린 <강산무진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