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택, 『삼국시대 손잡이 잔의 아름다움』 아트북스, 2022
얼핏 보면 어쩌다 하게 된 체험학습에서 어린 학생들이 만든 머그잔 같은 소박한 도기들. 대부분 낯설지 않은 모양새의 이 컵들이 알고 보니 천 오백년 세월을 파손되지 않고 견뎌낸 어마어마한 분들이다. 완벽하지 않은 형태에 큰 재주를 가미하지 않았지만 현대적인 미감도 가득하다. 고졸함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이 도기 잔들은 가야나 신라 같은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손잡이 잔들인데, 시간으로만 보자면 아주 오래 전의 유물이지만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거래되곤 한다.
우연한 기회에 이들을 알게 된 저자는 눈에 띄는 대로, 사정이 허락하는 대로 이 흥미로운 유물들을 구입했다. 미술비평가이자 대학교수로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는 미술계 전문가로서가 아닌, 아름답고 작고 소박한 것을 사랑한 컬렉터로서 이들을 구입하고 바라보고 쓰다듬었다. 10년 만에 그의 연구실에 어느 덧 삼백여 점의 컵들이 자리잡게 됐다. 지난 여름에는 《아르카익 뷰티 – 삼국시대 손잡이잔》 (현대화랑, 2022.8.24~10.16)라는 이름으로 갤러리 전시도 열렸다. 어느 이름없는 도공의 손으로 만들어져 땅에 묻혀 있다가 빛을 본 이후 천 오백년 만에 글로벌 대도시 유명 갤러리에서 화려한 조명 아래 주인공이 되는 반전을 겪은 것이다.
책에서는 저자의 수집품 삼국시대 손잡이잔 중 75점을 선택하여, 그것들을 들여다볼 다섯 키워드를 제시하고 한 작품씩 아주 자세히 들여다본다.
#기형 #주둥이 #손잡이 #문양 #색채
기형이 특징인 대상물이라도 주둥이나 손잡이, 색채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단순하다면 단순한 이들 유물을 구별해 내기 위해 자세히 각각의 잔들을 들여다보면서 특징을 발견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데 이 키워드들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에 더불어 저자의 경험과 시각을 녹여내어 미학적 고찰, 통찰을 풀어내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누군가는 그저 칙칙한 색깔의 토기일 뿐인데 여기에 무슨 그런 할 말이 많을까 싶을 것이다. 수많은 작가, 이론, 주변의 사물들이 이 잔들을 설명하는 데 동원된다. 무엇을 닮았는지 이야기하기 위해서 부처의 귀, 풍선, 훌라후프, 나팔꽃, 레슬링 선수의 귀, 달팽이, 고사리를 들고, 김환기, 이상범, 윤형근, 권진규, 박서보, 권옥연의 작품세계와의 연결고리를 찾기도 한다. 유명한 마원의 수도(水圖)나 민화, 분청사기, 목기와의 직관적 유사성을 들기도 하고, 하이데거, 노자, 메를로퐁티, 바타유, 종병, 마르셀 프루스트, 롤랑 바르트, 칸트의 이론을 끌어들여 미학과 본질에 대해 깊이 고찰한다.
이들이 우리 전통적인 도자의 모습과는 조금 다른 계통처럼 보이는 것은 그 때만 존재했었고 그 이후에 이런 도기나 자기가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국에 뿌리를 둔 우리 전통 도자와 다른, 그리스 도기 문화가 건너온 흔적이다. 불교의 전래, 매장문화의 변화 등으로 인해 이들이 맥은 끊어졌다고 보았다. 어쨌거나 단순한 골동품을 벗어나 문화유산으로 보존되고 연구되기 위해서는 학술적 가치가 인정되어야 하는데, 대부분 내력을 확인하기 어려운 것들임이 안타깝다. 그래서 이 잔들을 하나하나 현대 미술의 오브제로 바라보는 데 집중하게 되었고, 또 그랬을 때 이 10센티미터 남짓한 작은 유물들이 어떤 현대미술보다 큰 감흥을 주었다고 고백하기에 이른다. "이미 현재에 와버린 과거의 얼굴"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한 점의 과장도 없다.
전시를 볼 때는 아무리 컬렉터라고 해도 그 많은 비슷비슷한 잔들을 하나하나 설마 다 구분하고 알아보실까, 생각했었지만 그것은 괜한 생각이었다. 이렇게 자세히 들여다보고 그 특징을 깊이있게 생각해 왔다면, 자동차 덕후가 스치는 그림자만 봐도 자동차를 알아보듯, 일란성 쌍둥이 엄마가 운동장 너머 체육복 입은 아이들을 구분해 내듯, 일별만 해도 한 작품 한 작품 충분히 구분이 가능하실 거라는 생각을 자연스레 갖게 됐다. 그 모든 것은 애정의 힘이다.
전시를 볼 때는 아무리 컬렉터라고 해도 그 많은 비슷비슷한 잔들을 하나하나 설마 다 구분하고 알아보실까, 생각했었지만 그것은 괜한 생각이었다. 이렇게 자세히 들여다보고 그 특징을 깊이있게 생각해 왔다면, 자동차 덕후가 스치는 그림자만 봐도 자동차를 알아보듯, 일란성 쌍둥이 엄마가 운동장 너머 체육복 입은 아이들을 구분해 내듯, 일별만 해도 한 작품 한 작품 충분히 구분이 가능하실 거라는 생각을 자연스레 갖게 됐다. 그 모든 것은 애정의 힘이다.
제작방법, 시대와 지역적 백그라운드, 기원, 발견, 사용처의 추정 등 학구적인 내용들을 앞쪽에 싣지 않고 맨 뒤쪽으로 한꺼번에 정리하여 넣은 선택도 좋았다. 투박한 머그잔들에 대한 책이 이렇게 두꺼울 일일까, 뭐 그리 어려울 게 있을까 했던 것이 무색하게 책 안에는 양적으로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하루에 한 두점씩 감상하고 그 꼭지를 꼭꼭 눌러 읽어가며 소장자의 기쁨을 공유하는 방식을 추천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