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철규, 『산수와 풍경의 세계 - 7명의 고전과 7명의 선구』, 미진사, 2022
오징어는 왜 오징어처럼 생기고, 사람은 왜 사람처럼 생기게 되었을까. 같은 지구상의 생명이지만 어느 한 시점에서 시작된 돌이킬 수 없는 진화는 계속 진행됐고 오징어와 사람은 절대 서로 섞일 수 없는 생명체가 됐다.
오래 전 떨어진 대륙에서 서로가 섞이거나 마주치는 일 없이 살다가, 눈과 뇌와 손의 협응 능력이 뛰어났던 일군의 사람들이 주변을 평면 위에 베껴 그리게 되었는데, 동양에서는 고도의 철학적 질문을 담은 산수화를 만들어 냈고, 서양에서는 추상화로 해체되기 직전까지 자연을 프레임에 담는 랜드스케이프를 발전시켰다.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과 결과물로서의 작품이 전혀 다른 모습인 두 카테고리의 예술, 산수화와 풍경화, 이 두 예술이 시작된 지점과 도전, 극복의 역사를 들춰보는 신간이 『산수와 풍경의 세계』이다.
3차원 공간을 평면에 옮기기 위해, 진짜 같이 보이게 하기 위해, 지척에 천리의 의미를 담기 위해, 마음의 상태나 정취를 담아내기 위해, 각종 목표를 세운 탐구자들은 수천 년간 치열하게 고민하고 반복 실험하고 자기주장을 해 왔다. 동양의 산수와 서양의 풍경을 비교하거나 교차하면서 감상하도록 하는 서적들은 종종 있었지만, 중국에서의 산수화의 발달 과정과 유럽의 풍경화 역사를 비슷한 시대를 비교하며 결정적 장면을 만들어낸 인물과 그 당시의 상황을 이만큼 깊고 쉽고 자세하게 풀어낸 글은 드물다.
긴 시대와 넓은 지역을 오가는 고찰 속에서 풍경화에 대해 설명하는 말이 산수에 그대로 적용되기도 한다. 서양에서 풍경이 예술의 대상이 된 시기는 (인간이) “풍경에 대한 특별한 감정이 싹트게 될 때”였다는 설명이 있는 것처럼, 중국의 초기 산수화 화론에도 비슷한 말들이 있으며, 서양에서 아카디아를 그려낼 때 동양에서는 은자의 이상적인 삶을 화폭 속에서 추구하기도 했고, ‘시를 그림처럼’이라고 했던 서양의 시인이 있는 반면에 ‘서화동원’이라고 했던 중국의 이론가가 있다.
이당 <만학송풍도> 1124, 비단에 채색, 188.7x139.8cm, 타이페이 고궁박물원
요아힘 파티니르, <성 제롬이 있는 풍경> 1516, 나무판에 유채, 74x91cm, 마드리드 프라도미술관
워낙 방대한 시간과 공간을 다루다보니 포인트가 될 만한 인물이 필요했던 듯하다. 책의 부제를 통해 7명의 ‘고전’과 7명과 ‘선구’를 정했다. 고전은 동양, 선구는 서양의 화가들인데 각각 다음과 같다.
고전 - 이성, 동원, 이당, 황공망, 오진, 예찬, 왕몽
선구 - 얀 반 에이크, 파티니르, 푸생, 로랭, 컨스터블, 터너, 코로
이들은 각 시대별 대표로 한 명씩 선정된 것은 아니며, 산수와 풍경의 전개 및 발달 과정에서 어떤 결정적 순간을 만들어낸 인물들임은 맞지만 동서양이 서로 일대일대응이 되지도 않는다. 3장에 이르러야 고전과 선구가 된 인물들이 등장하며 산수 편에서는 특히 더 시대가 몰려 있다(동원과 이성은 오대-북송초, 이당은 남송, 나머지 사람들은 원말). 이 14명은 책을 읽을 때에 포인트 지점이 될 수 있는 중요 화가로 뒤로 넘어갔다가도 다시 언급되고는 한다.
왕몽 <구구임옥도> 1368, 종이에 채색, 68.7x42.5cm, 타이페이 고궁박물원
오위 <어락도> 15세기, 종이에 담채, 270.8x173.5cm, 베이징 고궁박물원
이들 외에도 많은 유럽, 중국의 화가들이 끝없이 등장하기 때문에 평소 회화사에 관심이 많고 기본적인 역사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다소 어려울 수 있다. 인물이나 용어가 생소하여 입력이 까다로울 수 있는 데다 특히 동양의 산수에 대한 화론은 전공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역시 너무 어렵다. 저자는 최대한 쉬운 어휘를 사용하고 기존의 전문 서적들에 비해 문장을 단순화해서 독자들의 머리 속에 최대한 많은 데이터를 차곡차곡 쌓아주려고 한다. 일반적으로 서양 화가나 미술사에 대해서는 국내의 전시나 해외 여행, 많은 교양서를 통해 알려진 바가 많아 읽기 쉬운 편인데 반해 중국 미술사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이들이 많고 국내에 전시를 통해 소개되는 경우도 거의 없어서 중국 화가와 용어, 미술사의 전개에 대해서는 생소하게 여겨질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을 때 산수 꼭지와 풍경 꼭지를 읽는 속도에서 절뚝거리게 될지 모른다.
카날레토 <산마르코 선착장> 1738경, 캔버스에 유채, 시카고미술관
중국 미술이나 일본 미술에 대한 이해도나 애호도가 낮은 것이 먼저인지 동양의 서화를 감상할 기회가 적은 것이 먼저인지 알 수 없다. 아무리 우리 옛 그림이나 근대의 우리 회화를 들여다보자고 말해도 한반도 내에서 쌓아져 온 것만 보아서는 그 실체를 알 수 없게 마련이다. 주변을 공부하고 알게 될수록 우리 예술의 다른 점과 특별한 점이 더 보이게 마련이다. 그러니 중국이나 일본이 이쁘게 보이지 않더라도 그들을 공부해야만 한다. 그들의 성과에 우리의 것을 비교해 자존심 상해 할 필요도 없다.
그림의 전개 양상을 설명하면서 유명 화가의 이름, 대표작과 함께 업적을 서술한 것을 익히는 것만으로는 알 수 없는, 그 시대의 사람들이 겪은 어려움이나 환경, 그들에게 요구된 미션에 대한 다각의 접근을 시도하다 보니 같은 시대에서 언급되곤 하는 주요 화풍에 대해서는 가볍게 다루고 지나가거나 과감히 포기한 면도 있다. 그 시대의 경제력, 사회적 문화적 현상들을 더 자세히 다루어 상황을 입체적으로 볼 수 있도록 하는 데 보다 중점을 두었다.
이 책의 미덕 중 하나는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귀한 도판을 세심하게 최대한 많이 배치해 넣었다는 데 있다. 이성, 관동, 범관의 산수화를 이어서 보면서 북방식 산수화 계열의 특징을 눈에 새길 수 있고, 이당의 부벽준과 마원의 부벽준의 차이를 볼 수 있으며, 동원의 화법이 남송에 계승되지 않다가 조맹부와 원말 사대가에 이르러 영향을 끼친 바를 느낄 수 있다.
책의 내용은 시기와 발전 양상을 기준으로 크게 다섯 장(단계)으로 나뉘어져 있다. 1. 고대의 자연 2. 자연 묘사의 발전 3. 고전의 완성과 새 시대의 개막 4. 고전의 정착과 풍경의 발견 5. 종말과 새로운 모색. 이것이 동서양 시대를 모두 아우르는 구분과 타이틀을 담아야 해서 읽기 전에는 이런 시대 구분이 얼른 머리 속에 들어오지 않을 수 있으나 다 읽고 나면 왜 이런 구분이 필요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완독 후에 좀더 명확하게 흐름을 파악하고 싶다면, 풍경을 제외하고 산수 부분만 떼어 다섯 챕터를 주욱 연결하여 읽어 보고, 또 반대로 산수를 건너 뛰고 서양의 풍경화 부분을 연결해서 읽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제백석, <고주도해도> 20세기초, 종이에 먹, 67.8x42.1cm, 장사 호남성박물관
토마스 존스 <나폴리의 벽> 1782, 종이에 유채, 11.4x16cm, 런던 내셔널갤러리
누군가가 풍경화와 산수화가 무엇이 다른지 왜 달라졌는지 의문을 가져왔던 사람이라면 공통의 근거와 동력을 가졌던 그림이 서로 다른 환경 속에서 분화 발전되면서, 그래도 남아 있는 공통된 부분과 서로 다른 부분을 정리하도록 해 준다. 듬성듬성한 얼개 속을 조금씩 채워간다고 생각될 것이다.
이제 전시장에서 푸생이나 로랭, 터너의 풍경화를 대하게 되면 이들이 이상적인 풍경이라고 생각했던 도전은 무엇이었고, 수직과 수평의 구도, 수평선, 공간과 빛을 어떻게 다루었는지를 유심히 보게 될 것이고, 동양의 산수화를 접하게 될 때 그 시대 어떤 상황에서 어떤 고전의 영향이 녹아들어가 있는지를 찾아보는 재미가 생기게 된다. 인류의 성취가 나 한 사람 안에서 자리잡는 풍족함을 느낄 수 있다면 이번 가을 미술책 한 권쯤 끼고 완독할 만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