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택 『朝鮮前期 釋迦誕生圖 - 福岡 本岳寺』한국불교회화 명품선 1, 한국미술연구소, 2020.11
11월 정우택 동국대 명예교수가 펴낸 『조선전기 석가탄생도-후쿠오카福岡 혼가쿠지本岳寺』는 한국 불교회화의 명품 40점을 선정하여 작품마다 한 권씩 펴낼 계획인 ‘한국불교회화명품선’ 시리즈의 첫 권이다.
혼가쿠지 석가탄생도 전면을 아이템별로 기호화 하여 세부 그림을 구분하고 찾아볼 수 있도록 했다.
혼가쿠지(本岳寺)에 소장되어 있는 석가탄생도는 세로 145cm, 가로 109.5cm의 비단에 채색된 그림이며 보존 상태가 매우 좋은 편이다. 어느 정도 불화 도상에 관한 지식이 있다면 마야부인, 무수, 구룡하향수 등의 주제를 짚어본다면 이 그림이 석가탄생도임을 알아볼 수 있다.
조선왕조시대 석가탄생도상 연구
고려시대 불화 연구는 꾸준히 진행되어 상당 부분 성과를 보아 정리되고 있다. 그에 비해 조선 전기, 즉 임진왜란 이전까지의 불화 양상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아 불교회화사의 공백으로 남아 있다. 화풍, 양식 변화를 밝혀낼 작은 연결고리들이 있다면 공백을 메꾸는 데 도움이 될 것은 분명하다.
석가여래가 어떻게 이 세상에 오게 되었는지를 여덟 장면으로 압축 묘사한 도상인 석가팔상도는 불교 회화에서 보편적인 편에 속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상당히 많이 제작되었으리라 짐작하고 있으나 현재 남은 작품은 의외로 많지 않다. 조선 전기의 경우 석보상절이나 월인석보에 실린 판화가 유일한 정도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에서 조선 초 그림으로 여겨지는 혼가쿠지 소장 <석가탄생도>가 공개되어 관심을 끌었던 바 있다. 이 그림은 1997년 일본 야마구치현립미술관의 ‘고려·이조(조선)의 불교미술전’에서 일반에 처음 공개된 것이다.
혼가쿠지 석가탄생도와 그 모사본
두꺼운 양장본 책의 1/3은 혼가쿠지 석가탄생도 전체와 부분 촬영 이미지로 채워져 있고, 그 뒤에는 이 석가탄생도에서 파생된, 넓은 의미에서의 모사본이라고 할 수 있는 석가탄생도들의 전면-상세 도판이 설명과 함께 실려 있다.
모사본 별 도상의 차이 비교
석가탄생도가 일본에 수용된 이후 이는 판본이나 판본채색 또는 육필화로 재생산되면서 상당기간 넓은 지역에 유포, 신앙의 대상 역할을 했다. 한중일에 전래된 동아시아 불교 도상 가운데 모사본이 가장 많이 제작되고 넓게 유포된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책에는 지바현 고마쓰지(小松寺)부터 후쿠오카시립미술관 등에서 발견한 모방작 등 저자가 파악한 18점의 석가탄생도 중 7점의 도판을 실었다. 모사본이 원본을 닮게만 그리지는 않았기에 꽤 다양한 모습을 보이는데, 여러 판본에 나오는 도상 비교도 가능하다.
도록 뒤편에 수록된 정우택 교수의 논문에서는 혼가쿠지 석가탄생도의 제작시기, 도상학 등 작품 분석과 함께 이를 토대로 조선조 후기의 탄생도상에 미친 영향을 도상의 계승과 수용이라는 시각으로 서술하고 있다.
석가탄생도의 레퍼런스 『월인석보』(1448)
조선시대에 볼 수 있었던 경전 중에 석가여래의 일생이 들어 있는 것은 『방광대장엄경』, 『불본행집경』등 을 비롯, 한글 경전인 『석보상절』, 『월인석보』 등 그 종류가 적지 않다. 논문에서는 혼가쿠지 석가탄생도가 이 중 어떤 레퍼런스로 만들어진 것일지를 추적한다.
혼가쿠지의 석가탄생도는 석가의 일생을 여덟장면으로 압축 묘사한 팔상도라고 보기에 불완전한 면이 있다. 이러한 것도 석가탄생도의 한 유형이다. 탄생단 부분을 보면, 석보상절, 월인석보에 실린 <비람강생상(룸비니 동산에 내려와서 탄생하는 모습)> 판화와 도상이 거의 같다. 내용 비교 결과 도상학적 근거가 석가여래의 일생을 노래한 월인석보에 두고 있다는 근거로 풀이하고 있다. 글의 내용과 화기, 도상이 일치하는 부분, 즉 궁중에 모인 흰 코끼리, 일곱 줄기의 칠보연화, 동물들의 출산 형상 등을 들어 이 석가탄생도가 월인석보의 내용을 취사선택하고 탄생판화를 기본으로 한 것이라 결론지었다.
월인석보는 훈민정음 창제 이후 최초의 한글 불교 경전이며 왕이 직접 저술한 유일한 불경이다. 월인석보의 내용은 특히 『과거현재인과경』과 상당부분 일치하는데, 석가탄생도의 도상학적 근거도 따라서 이와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고 논하고 있다. 魔王不安本座 라는 문구 같은 것이 과거현재인과경 이외의 다른 경전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며 이를 풀어 쓴 내용이 월인석보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당시 월인석보를 도상학적 근거로 제작한 불화의 예는 또 있다. 고지高知 세이잔분코青山文庫 소장의 <정토왕생인연도淨土往生因緣圖>(안락국태자전변상도安樂國太子傳變相圖, 1576년)도 놀라울 만큼 월인석보의 내용과 일치하며 군산 동국사의 쌍림열반상은 월인석보 내용에 의거하지는 않으나 책에 수록된 판본 석가팔상도 도상을 충실하게 계승한 또 하나의 사례라고 볼 수 있다.
표현기법과 제작시기
혼가쿠지 석가탄생도는 오랜 시간이 지난 점을 고려하면 상태가 비교적 양호하다. 저자는 채색법, 구름의 표현 방법 등의 예를 통해 제작 시기를 추정한다.
의복에 사용된 이중채색법(바탕 전면에 칠을 한 다음 부분적으로 밝은-백색 안료로 덧칠하여 입체감을 살리는 기법)은 이미 고려불화에서도 사용되어 왔고 이것이 조선 초기에도 이어져 지은원의 관경변상도 등에서도 같은 채색법을 볼 수 있다. 그런데 16세기 중반의 불화에서는 이 예를 거의 볼 수 없다. 마야부인, 시녀의 얼굴 가운데 부분(이마 코 턱)에 백색 안료를 얇게 칠하고 있는데, 마치 하이라이트 같은 삼백법이 또한 고려불화의 전통이며 이는 16세기에도 계승된다. 화면 윗부분에 넓은 면적으로 자리잡아 주요 모티브 기능을 하는 구름의 표현도 기본적으로 묘법이 모두 같은데 朱, 靑, 綠, 黃土의 색으로 바탕을 칠하고 윤곽을 백색안료로 바림하듯 그린 위에 같은 색감의 짙은 색 윤곽선으로 마감하는 식이다. 구체적인 기법을 통해 제작 시기를 조선 초기로 압축하는 과정을 세세히 설명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보아 이 도록의 가장 큰 미덕은 불화 원본을 확대 촬영한 고해상도 이미지로 가득하다는 데에 있다. 직접 가서 본다고 해도 이 정도로 자세히 보기는 어렵지 않겠나 싶을 정도인데, 작은 부분을 확대한 이미지가 너무 많다보니 전체 그림에서의 위치를 대조하며 보기에 다소 불편한 면이 있다.
저자는 그간 모은 수많은 불화 사진들을 정리해야만 한다는 책임감으로 시리즈를 내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한국 불화에 대한 연구의 초석을 다지고 활용 방안들을 모색하는 데에 가장 앞서야 하는 작업이어서 이 시리즈가 어떻게 이어질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