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열 『옛 그림으로 본 서울-서울을 그린 거의 모든 그림』
혜화1117, 2020년 4월
겸재 정선이 한강을 비롯한 한양의 모습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것이 1740년 정도이니 지금으로부터 약 280년 밖에 되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지금의 압구정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은 280년 전 정선이 화폭에 담은 압구정의 모습을 눈을 아무리 가늘게 뜨고 보아도 겹쳐 볼 수 없을 것이다. 정선이 그린 압구정 한강변의 풍경을 지금의 압구정과 연결시키려는 노력은 무의미하다.
정선, 〈압구정〉, 비단에 수묵담채, 20.2×31.3㎝, 간송미술관
그러나, 100여년 전의 모습이 모두 사라지고 바뀌었다고는 해도 산, 궁궐. 수도를 둘러싸고 있던 성곽 일부와 숭례문, 창의문 등의 성문들 정도는 남아 그림에서 그 흔적을 찾아갈 수 있다.
『옛 그림으로 본 서울』은 약간의 상상력을 동원해 그림이 주는 열쇠를 가지고 과거로 떠나 서울을 뒤덮은 콘크리트를 벗겨 보는 작업을 제안하고 있다.
선비들, 화원들, 그리고 직업화가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살고 활동하던 한양이라는 공간은 다양한 방법으로 이미지 자료가 되어 현재에 전해졌으며 그중 몇몇은 뛰어난 예술 작품으로, 어떤 것들은 중요한 역사적 자료로 전해지고 있다. 천만이 넘는 인구가 서울을 들락날락하며 살고 있지만 백여 년 이백여 년 밖에 안 된 과거 서울의 모습이 이렇게 다양하게 남아 그 때의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수묵화나 문인화에 대한 이해의 장벽, 취향의 변화 때문에 한국 옛 그림이 외면 받고 있는 시점에서 글로벌한 초대도시가 된 서울의 과거의 반전 모습이라는 미끼는 좋은 인도자가 될지도 모른다.
김홍도 <규장각> 115.6x144.4cm, 비단, 1776무렵, 국립중앙박물관
창덕궁 후원 규장각 풍경
미술사학자 최열의 조선 실경 그림 연구의 결과물 중에서 2002년부터 몇몇 매체에 연재된 글을 기본으로 해서 가지치기한 이 책은 집대성이라는 말이 딱 맞는 ‘옛 서울 그림의 모든 것’이다. 수록 작품은 조선 초에 해당하는 16세기의 것부터 20세기 초 심전 안중식의 것까지 모두 125점, 수록 화가 41 명이나 된다. 워낙 많은 자료의 종합이고 다양한 역사적 이야깃거리가 모아져 있어서 한번에 후루룩 읽게 되지는 않는다. 그림만 해도 서울의 실경을 그린 산수도, 궁궐도 등 지도 형식의 그림, 계회도 등 모임의 기록화 등 카테고리가 섞여 있고, 서울을 지역으로 구분해 한 지역에서 일어났던 사건과 살고 활동했던 사람들의 이야기, 그것과 연관되는 그림들을 하나씩 소개하며 확장시켜 나갔다.
책에서 다루고 있는 지역은 크게 다음처럼 나누어 챕터화 했다.
1. 도봉산, 삼각산, 백악산, 경복궁
2. 세검정, 탕춘대, 오간수문, 홍지문, 석파정, 창의문
3. 장동, 인왕산, 필운대
4. 서소문, 서대문, 경희궁, 청계천
5. 창덕궁, 동대문, 혜화문, 망우리
6. 남산, 숭례문, 용산
7. 한강 1- 광나루, 송파, 중랑천, 서빙고, 옥수동, 동작동, 흑석동
8. 한강 2- 노량진, 밤섬, 선유도, 행주산성
장시흥 <동작촌> 17x21.6cm 종이, 18세기, 고려대박물관
한강대교와 동작대교 북단 이촌동 한강공원에서 강 건너 동작대교 남단에 있는 국립서울현충원 쪽을 바라본 풍경
우리가 많이 본 정선의 산수화 등 장동의 그림들, 마장의 말 그림, 밤섬, 노량진에 얽힌 슬픈 역사와 그때의 모습, 관상감에 근무하던 강희언의 돈화문 그림 등 다양한 스토리가 그림과 함께 보여지니 그림만 보아서는 그냥 그런 옛날 그림이었던 것이 이야기와 함께 살아숨쉬게 된다. 그려진 모습이 이러이러하니, 이것은 어디에서 어느 방향으로 본 각도라는 (아마도 철저한 답사를 근거로 하셨을) 안내 글로 인해 관람자가 가진 서울 지리 정보를 최대한 끌어내면서 작품을 보게 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책 전체로 보았을 때 가장 정점에 이르는 작품을 고른다면 아무래도 <동궐도>가 될 듯하다.
"봄날의 싱그러운 기운을 가득 품은 채 경사진 땅의 결을 따라 좌우로 활짝 나래를 편 걸작이 탄생했다. 평행과 사선을 교차시키는 구도법을 적용함으로써 안정감과 율동감이 조화를 이루어 막힘없이 시원한 <동궐도>는 또한 비단 바탕에 고운 물감을 가는 붓으로 찍어 촘촘하기 그지 없는 정밀한 화풍이며, 사선으로 비탈진 땅을 파헤치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 두고서 건물과 도로를 배치하여 자연과 인공의 완전한 조화를 이룩한 공간 구성을 제대로 재현한 사실성이 절정에 이르렀다. 이뿐만 아니라 지도와 회화를 합쳐 하나의 소우주를 연상케 하는 일종의 환상세계를 보는 듯하다. 이렇듯 정지와 운동, 안정과 율동, 자연과 인공, 사실과 환상, 평행과 사선, 지도와 회화의 모든 것을 융합시킨 이 <동궐도>는 19세기 궁중회화가 탄생시킨 최대의 걸작이다."(본문 중에서)
"봄날의 싱그러운 기운을 가득 품은 채 경사진 땅의 결을 따라 좌우로 활짝 나래를 편 걸작이 탄생했다. 평행과 사선을 교차시키는 구도법을 적용함으로써 안정감과 율동감이 조화를 이루어 막힘없이 시원한 <동궐도>는 또한 비단 바탕에 고운 물감을 가는 붓으로 찍어 촘촘하기 그지 없는 정밀한 화풍이며, 사선으로 비탈진 땅을 파헤치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 두고서 건물과 도로를 배치하여 자연과 인공의 완전한 조화를 이룩한 공간 구성을 제대로 재현한 사실성이 절정에 이르렀다. 이뿐만 아니라 지도와 회화를 합쳐 하나의 소우주를 연상케 하는 일종의 환상세계를 보는 듯하다. 이렇듯 정지와 운동, 안정과 율동, 자연과 인공, 사실과 환상, 평행과 사선, 지도와 회화의 모든 것을 융합시킨 이 <동궐도>는 19세기 궁중회화가 탄생시킨 최대의 걸작이다."(본문 중에서)
너무 많은 정보에 다음에 찾을 일들을 생각하고 조금 더 보기 쉽게 정리된 자료가 있으면 좋겠다 싶어질 때 책 뒤쪽을 보면 본문에 작품이 실린 화가별(가나다순)로 설명과 작품의 작은 이미지와 본문에 등장하는 페이지 등을 정리해 놓아 찾아보기 좋도록 했다. 개인 소장품 등 평소에 잘 볼 수 없는 그림들이 빼곡히 실려 있어 책의 가치를 더해주고 있다. 다만 세로로 긴 작품들을 책의 양면에 가로로 배치해 돌려 보게 한 경우가 많았는데, 그중 일부는 가운데 부분이 접혀 한눈에 보기 어렵고 이미지 사이즈가 작은데도 확대되어 아쉬운 면이 있었다.
과도한 정당정치, 사대주의로 물든 집권 세력, 이 땅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전쟁 등 조선시대 전반에 관련된 역사를 대할 수밖에 없어 책을 읽는 내내 슬픈 마음이 들지도 모르고, 좀더 많은 작품이 남지 않은 것에 대해, 더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에 대해 안타까울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자는 독자들이 옛 그림을 통해 서울을 보는 시각을 장착하고 더 애정하기를 희망하며 오늘의 이 모습의 서울이 그 속에 품고 있는 옛 풍경을 떠올리면서 얻는 감동을 함께 하고 싶어한다. 그것이 서울의 미래를 잘 빚어나갈 힘이라고 여기는 것은 아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