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렬 『천년의 화가 김홍도 - 붓으로 세상을 흔들다』, 메디치, 2019.12
"홍도는 그날부터 심사정의 제자가 되어 그의 옆에서 먹을 갈았다. 심사정에 대한 호칭도 나리에서 스승님으로 바뀌었다. 심사정은 먹을 가는 틈틈이 스승의 그림 그리는 모습을 눈에 담으려는 홍도의 열정과 자세를 기특하게 여겼다. 며칠 뒤 심사정은 홍도를 불러앉혀 그가 보고 싶어하던 <고씨화보>를 내밀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을 때 인문이 사립문을 열고 들어왔다.
"사능아, 별제 나리께서 너를 데리고 오라신다. 이제 너도 화원이 되는 거야."
홍도는 예상보다 빠른 합격 소식에 놀랐고 무엇보다 믿기지 않았다. 그런 친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인문은 어서 도화서로 가자며 싱글벙글했다."
지금부터 250여 년 전, 한 젊은이가 그림에 대한 꿈을 꾸며 도화서로 들어가는 장면을 떠올려 본다. 동갑내기 친구 이인문, 어릴 때 스승으로 모신 강세황, 어진 제작을 위해 떨리는 마음으로 대한 영조대왕, 화원 선후배인 변상벽, 신한평, 박유성 등 그를 둘러싼 역사적 인물들이 부피를 가지면서 살아나 입체화된다. 박물관에서 김홍도의 그림을 대하고 김홍도에 대한 논문들을 읽었을 때는 나타나지 않았던 현상이다.
전기 작가 이충렬에게 있어서 김홍도의 전기는 턱없이 부족한 자료들을 최대한 살펴 그의 삶을 최대한 진실에 가까우면서도 생명력을 가진 인간으로 구성해 나가는 어려운 미션이었다. 이 하나하나의 사실들을 차곡차곡 쌓고 꼼꼼히 살핀 후 이야기를 펼쳤기 때문에 독자는 김홍도라는 캐릭터가 살아나 자신의 말을 하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실제로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이 때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들은 어떤 관계였을까, 이 그림은 어떤 배경에서 그려졌을까라는 사람들의 궁금증에 대한 작가의 대답은 충분한 근거를 바탕으로 한 상상력의 결과이기 때문에 설득력을 얻는다.
"강희언의 집으로 모인 화원들은 신한평, 김홍도, 이인문, 김응환 외에도 김응환과 계촌 사인인 한종일, 화원인 김득신, 김석신과 이종현도 있었다. 모두 1방 화원들로 당대 최고의 화원이었고, 한종일과 이종현은 이인문과 같은 종6품 주부였다. 김홍도의 제자 박유성은 그런 당대의 화원들 옆에서 그림을 배웠다."
작가는 이 책이 김홍도의 평전이 아닌 ‘전기’라고 강조한다. 전기는 주인공의 삶의 행적을 따라갈 뿐, 평전처럼 주인공의 삶과 업적을 평가하지 않는다. 독자가 주인공을 이해하고 평가할 수 있도록 삶의 행적을 빈 공간 없이 채워 넣어야 하고 그를 위해서 아주 조그마한 흔적이라도 찾아내 그것을 씨줄 날줄로 삼아야 한다. 조선시대 화가에 대한 기록은 대부분 빈약하기 짝이 없어서 언제 무엇을 했는지 등에 대해 알기 어려운데, 김홍도는 다행히 어용화사였고 그덕에 벼슬을 해서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에 행적을 남겼다. 그가 교유했던 사람들에 대한 기록, 조선시대 관직이 어떤 식으로 주어지고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에 대한 연구자료 모두 김홍도의 삶을 구성하는 데 살이 됐다. 어진을 그릴 때의 분위기, 광통교에서 그림이 거래되는 장면, 양반과 중인들이 서로를 대하는 미묘한 대화들도 자연스럽게 이야기 속에 녹아나 그 시대를 설명한다.
"김홍도는 한동안 입직실에 대기하며 주문이 들어오는 대로 금강산 그림을 그렸다. 정조가 두 화원이 진상한 화첩을 크게 칭찬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주문이 밀려들었던 것이다. 김홍도는 웬만한 조정대신들의 주문보다 광통교 서화사의 주문을 우선적으로 그렸다. 먼 여행을 떠날 형편이 못되는 평민들에게 금강산과 해금강의 절경들을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그의 금강산 그림은 이렇게 세상으로 퍼져나갔고, 많은 방외화사가 그의 그림을 모사해 팔았다. 도화서 화원들이 그에게 가짜 그림이 나돈다는 얘기를 하면, 김홍도는 누가 그리든 금강산의 절경을 보고 즐거워하면 되는 거라고 웃어넘겼다."
김홍도는 어진을 그려 종6품 사재감 주부가 되었으나 관원이 치러야 하는 시험을 통과하지 못해 파직이 되기도 했고, 녹봉을 주지 않는 별제 품직을 받아 일을 하며 그림을 그려 팔아야 하는 생활고를 겪었다. 울산 감목관아에 가서 말을 돌보는 사람들의 괴로운 처지를 맞닥뜨리기도 하고, 연풍 현감으로 갔을 때 백성을 수탈했다는 누명을 쓰고 파직을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중인 무관집안에서 태어나 어렵사리 화원이 되고, 실력을 인정받아 어진을 그려 관리가 되어서도 살얼음판으로 살 수밖에 없었던, 천재적인 역량을 지닌 화가이면서도 괴롭고 불행하게 마감된 그의 삶은 그의 화려한 업적에 비해 슬프고 초라하다.
그림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책을 읽으면서 등장하는 대표작들, 즉 금강사군첩, 병진년화첩, 단원풍속도첩의 여러 그림들, 단원도, 송석원시사야연도, 서원아집도, 균와아집도, 추성부도 등이 제작되는 배경의 재구성을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그의 그림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의 화업에 대해 쉽게 소개하는 효과가 있다. 단순히 한 인간 김홍도의 삶을 재구성한 전기라 할지라도 '단원'의 의미, 박유성이 김홍도를 스승으로 모셨다는 언급 등 이 책에 새롭게 제기된 문제들과 기존에 알려졌던 것과 다르게 가정된 부분에 대해서 학계는 어떻게 반응할지, 또 앞으로 더 많은 자료들이 발견되어 조선시대 화가들의 삶이 더 많이 알려지게 될지 궁금하고 기대되는 바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