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및 정리 / 김진녕
황정수 『일본 화가들 조선을 그리다』
744쪽, 이숲, 2018.11
가까운 과거인 일제시대는 21세기 한국인에게는 미지의 영역이 더 많다.
조선이란 봉건 시스템은 20세기 초 일본 제국에 병합된 뒤 산업혁명부터 2차대전까지 근대화 과정을 ‘대일본제국 시스템’에 의지해 받아들였다. 때문에 한반도에서 20세기 중반까지 지식인이라고 불리는 부류는 모두 일본어로 교육받고 일본제국 시스템으로 교육받은 이들이었다
화단도 마찬가지다. 일본이란 선행학습자와 교육시스템을 통해 서양화와 개량된 동양화가 유입됐다. 1950년대 이전부터 활동했던 한국 화단의 선구자로 꼽히는 거의 모든 이들이 일본 스승이 있었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그들이 어떤 교육을 받고, 누구의 영향을 받고, 어떤 사조에 몸을 담았는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알려고 하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일본 화가들 조선을 그리다>(황정수 지음, 이숲 발행)란 책이 나왔다.
지은이는 황정수미술연구소 소장이자 한국 근현대 미술 자료 발굴과 컬렉터로 활동하는 황정수씨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왜정시대라고 불리는 일제강점기 기간에 조선에서 활동했던 일본 화가의 활동을 담아내고 있다. 그때 나왔던 공문서나 신문기사, 잡지, 전시회 도록 등을 일일이 뒤져서 한 땀 한 땀 이어붙인 데이터 저널리즘에 가까운 책이다. 덕분에 왜정시대의 활동 내역이 공백에 가까웠던 한국 근현대 미술사의 한국의 이름값 높은 작가들의 1950년대 이전 활동상과 시대상이 저절로 드러나고 있다. 이를테면 운보 김기창의 1930년대 활동상 등 이 책을 통해 처음 공개되는 사실도 많다.
744쪽의 책을 몇 단락의 글로 줄일 수는 없다. 그의 얘기를 들어보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이 책의 후속작도 나오는가.
2부는 이미 열편을 썼고 한 30편 써서 낼 것이다. 지금 중요한 것은 자료 제공이니까. 나는 인터넷을 통해 도판 하나만 발견해도, 나는 그걸 다운만 받아도 자료를 확보했다고 생각한다. 실제 작품이 없더라도, 일제 시대에 나온 잡지에 도판 하나를 찾았다면 자료라고 생각하는데 요즘 사람들은 미술관에 있는 실물이 아니면 자료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번 책은 연구서 비슷하게 되면서 도판이 작았다. 도판을 키우면 책 분량이 늘어나서 한 권으로 끝내면서 할 수 있는 방법을 찾다보니 도판이 작아졌다.
출판사도 2부를 낸 뒤, 차후 도판 위주의 책을 낼 예정이다. 지금 이 책의 도판은 너무 작다. 나는 도판이 작은 이 책을 보고 도판 실물을 보고 싶어하는 연구자가 5명만 되도 좋겠다고 생각한다. 두고보면 알겠지만 그게 안될 것이다. 몇 년 지나도.(웃음).
이를 테면 이 책의 표지에 쓰인 이시이 하쿠테이(石井柏亭, 1882~1958) 의 그림은 책 내용에는 없다. 이시이 하쿠테이는 이중섭의 선생이다. 당시 우리나라 미술계에 영향력이 센 사람이다. 그럼 한국 미술사 연구자들 중 당연히 그의 그림에 대한 관심을 가지 사람이 나와야 하는데 ‘이시이 하쿠테이-이중섭’을 연관 단어 정도로만 알지 그 연관성과 영향 관계, 시대상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다.
-1부와 2부는 책 내용이 달라지나.
일제 시대에 조선을 그린 화가 중 조선에 와서 산 사람과 조선미술전람회의 심사위원이나 여행을 온 사람이 있는데, 1부에서는 그걸 나누지 않은 게 실수다. 또 시기별로도 나눠야 하는데, 전해지는 작품이 너무 없어서 그럴 수 없었다. 이 책에 실린 대부분의 작가가 생몰년도도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해방 뒤 그들은 일본에 귀국해서 ‘식민지에서 활동했던 삼류 화가’, 한국에서는 ‘일제 식민주의의 주구’라고 여겨서 양쪽에서 버림받았다. 생몰년도나 현황,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일본 연구자들이 ‘혹시 한국에서 활동한 사람 중에 이런 사람 있느냐’고 물어오는 지경이다. 아사카와 다쿠미, 야나기 무네요시 등을 이야기 하면서 ‘조선인이 된 일본인’이라고 이야기 한다. 그런데 그 시절을 살펴보면 아사카와 다쿠미만 그런 게 아니다. 조선을 좋아한 일본인이 많다. 너무 조선을 좋아했던 일본인이 많다.
가타야마 탄은 조선식의 그림을 그렸고 가토 쇼린은 한국을 너무나 사랑한 화가다. 도쿠다 교쿠로(德田玉龍, 생몰연대 미상)는 금강산에서 사진관을 하며 금강산을 너무 사랑해 토굴에 살면서 금강산 그림만 그렸던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을 어찌 해야 하나.
한국을 사랑하고 일제 치하에서 산림보급 운동을 한 아사카와 다쿠미(浅川巧, 1891~1931)를 ‘굉장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게 여기면서 다쿠미만큼이나 한국을 좋아했던 일본 화가를 이야기하면 일각에서 ‘왜 일본인을 더 좋게 얘기하냐’고 한다.
그런데 다쿠미보다 쇼린은 더 했다. 그는 한국을 너무 좋아했다. 평생 한국 소재로만 그렸다. 해방 뒤 일본에 가서 300점을 그렸는데 그게 다 한국 소재 그림이었다. 일본에 가서도 조선그림만 그리고, 조선족 학교에 가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한일 친선단체 일만 했는데. 이 사람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나. 이런 사람을 어찌 할 것인가. 평생을 계속 조선 얘기만 한 사람이다. 나는 이들을 우리 미술사에 넣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책에서 어떤 곳은 한국이라고, 어떤 곳은 조선이라고 썼다. 일본 사람이 조선을 사랑해서 조선에 대해 기술한 대목은 다 조선이라고 표기했고 내 입장에서 한국이라고 좋겠다고 생각한 것은 한국이라고 썼다.
-이들과 한국 작가는 어떻게 연결이 되는 것인가.
국내 미술사가들이 이상범과 김은호가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심사참여’를 했다고 꼭 언급한다. 그때 선전에는 5명이 심사참여를 했는데 이상범과 김은호만 언급하지 나머지 세 명의 일본인 심사위원 얘기는 안한다. 그때 심사에 참여한 일본 심사위원이 가타야마 탄과 가토 쇼린, 마츠다 레이코다. 이당과 청전 그리고 세 명의 일본인은 모두 친구다.
그때 이당의 제자인 운보가 거기에 가면 이당에게만 인사하고 일본인에게는 인사안했을까? 다 선생과 동급의 어른들인데. 그들 모두 운보가 영향을 받은 선생이라고 봐야 한다. 그럼 그 세 명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그 시절 우리 미술사의 전모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나혜석이 선전에서 4등을 했다.(1923년 제2회 조선미술전람회, <봉황성의 남문>) 그때 1,2,3등은 일본인이었다. 어떤 작품이 1,2,3등을 탔는지 알아봐야 한다. 조선미술전람회 도록 19권이 있다. 그런데 제1회에 누가 상을 받았고, 전체적으로 한국인은 몇 명이고, 일본인은 몇 명인지, 그런 데이터가 없다. 알아봐야 하지 않겠나? 조선미술전람회에 대한 기록이 정리가 안되면 우리 근대미술사가 정리가 안된다.
조선미술전람회는 일본의 문부성 전람회를 흉내낸 것이다. 그때는 한국 사람이든 일본인이든 제국미술전람회나 문부성 전람회에 상받는 게 꿈이었다. 이당도 거기서 상 받은 것을 큰 자랑으로 여겼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문부성 전람회 수상 기록물이 없다.
그런데 우리 미술사가들이 책을 쓸 때마다 ‘이당이 문부성 전람회에서 상받았다’는 기록을 쓴다. 그럼 그들은 그 기록을 봤을까? 내가 관련 연구자를 만날 때마다 ‘문부성 전람회 기록을 보고 싶다’고 문의하면 그때부터 냉랭해진다. 상황이 이러니 기초 자료부터 다 틀린 것이다. 선생이 틀린 내용을 바탕으로 논문을 쓰면, 그걸 인용한 제자부터는 다 틀리는 것이다.
1회부터 23회까지 열린 조선미술전람회에 대한 기록이 다 엉성하다. 심사위원이 1회는 누구였고, 23회까지 누구였는지 제대로 된 기록이 없다. 그나마 5년 전 일본에서 정리한 게 완벽하다. 그래서 내가 그걸 사진찍어서 카톡으로 연구자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이거 참고하라’고, 틀린 스승의 논문을 무비판적으로 인용하다보니, 심사위원 기록이 틀린 것도 계속 수정없이 통용되고 있다. 하필이면 선생이 틀린 기록이라, 그걸 고치지도 않고, 계속 논문에서 반복한다.
한국 학자들의 논문을 보면 그때 누가 심사위원으로 왔다는 기록이 틀린 게 부지기수다.
나도 틀렸다. 1935년은 14회 선전인데 그걸 이번 책에서 15회 선전이라고 썼다. 그래서 내가 페이스북에 오류를 고백하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실토한 오류보다, 이미 책으로, 논문으로 발간된 오류는 말도 못하게 심각하다.
-이 책의 발간에 어떤 의미를 붙일 수 있나.
책에 실린 46편의 글 대부분이 한국에서 처음 보고되는 것이다. 내가 아무렇게나(?) 써서 이번에는 다 엉터리일 수도 있다. 내가 아는(확보한_ 제한적인 자료 속에서 쓴 것이다. 이런 기록이라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징검다리용으로 쓴 것이다. 워낙 자료가 없으니까, 이것이라도 징검다리용으로 쓰였으면 한다.
예를 들어 후지타 쓰구하루(藤田嗣治, 1886~1968)라는 작가가 있다.(2차 대전 중 일본 전쟁화를 그려 전범으로 몰린 뒤 프랑스 국적으로 바꾸고 이름도 ‘레오나르도 후지타’로 개명)
우리 미술사에서 후지타 쓰구하루는 전혀 등장하지 않고 기록도 없다. 그런데 후지타는 조선에 와서 고종의 어진을 그리기도 하고 한국 풍경을 그리기도 했다. 지난 여름 도쿄에서 열린 전시에 그가 한국을 소재로 그린 30호짜리 작품이 나오기도 했다. 세계적인 지명도를 지닌 화가가 신혼 여행으로 한국에 와서 그런 그림을 그린 게 후지타에게도 너무 중요한 사실인데 우리는 그가 일본인이라고 우리가 무시해야 하나?
김병기 선생(103세)은 머리가 좋은 분이다. 그가 일본에 유학가서 가와바타미술학교와 문화학원에서 공부한 뒤 도쿄 미술학교를 안간 이유도, 또는 못간 이유가 있다. 그때 파리에서 돌아온 후지타에게 너무 반해서 아방가르드양화연구소에 간 것이다. 그때 김병기의 머리 속에는 후지타가 산같이 높은 데 있는 것이다.
그런데 김병기만 그랬을까. 이중섭은 안그랬을까. 한국 미술사가들이 ‘이중섭은 쓰다 세이슈(津田正周, 1907-1952)의 영향을 받았다’고 쓰는데, 누구도 쓰다 세이슈가 어떤 사람인지 연구를 안한다. 생전에 ‘이중섭이 좋다’는 진술을 남겼기에 책에 인용을 할 뿐이다. 이시이 하쿠테이 같은 사람은 이중섭에게 엄청난 영향을 준 사람인데, 아무도 그 얘기를 안쓴다. 그는 이중섭보다 34살 많았고 당시 일본 화단의 거물이었다. 이중섭이 수학한 문화학원의 미술부장이었는데 영향을 안받았을까?
이인성(1912~1950)은 태평양미술학교에 유학했다. 초대 교장이 나카무라 후세쓰(中村 不折, 1866~1943)다. 이인성이 나카무라 후세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상식아닌가, 그가 교장인데, 영향을 안받겠나. 그런데 한국에선 이인성에게 영향을 끼친 나카무라 후세스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두 사람의 누드를 보면 친연성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중섭이나 김환기, 이인성 등 그 세대의 사람은 일본의 영향을 받았고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일제 시대에, 경성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면 제대로 된 미술 교육을 받기 힘들다. 그런데 일본 유학을 가면 파리 유학을 다녀온 선생한테 배운다. 이건 하늘과 땅 차이다. 그게 부끄러운 일인가. 그렇게 어려운 환경에서도 배워서, 한국에서 기량을 발휘하면 그게 부끄러운 일인가. 이중섭이나 권진규가 그런 대단한 존재다.
권진규는 무사시노가 배출한 작가 중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가로 뽑히는 인물이다. 그럼 권진규의 스승에 대해서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어쨌든 그런 것에 대해서 해결이 안되면 우리는 발전이 없다고 본다.
일제시대에 일본으로 유학간 한국 대표 작가들에 대한 연구를 하는 것을 ‘일제 시대를 옹호한다’는 식으로 바라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 역사의 진실을 알지 않으면, 그 사람의 형성 과정에 대해 알 수가 없다.
-한국화에서도 이런 영향을 주고 받는 관계가 있는가.
김기창(1913~2001)은 자랑스런 한국 화가다. 운보는 이당 김은호(1892~1979)에게 배웠다. 운보도 어렸을 때는 이당처럼 그렸다.
그러다 1935년 노다 규호(野田九浦, 1879~1971)가 제14회 선전 심사위원으로 왔다. 노다 규호가 운보를 칭찬한다. 운보는 그 뒤 시간만 나면 도쿄에 가서, 노다 규호 화숙에 가서 공부를 한다. 곁눈질로 배운 것이다.
<엽귀>(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라는 제목의 운보 작품은 1935년 선전 입상작이다.
국내 학계에선 이 그림에 대해 ‘한국적 정서를 담았다’고 평가하는게 그 동안의 일반적인 평가다.
하지만 이 그림은 전형적인 일본화의 틀을 답습하고 있는 그림이다.
우리 전통 그림에선 수수를 그리지 않는다. 조를 그린다. 무엇보다도 이 그림은 같은 해에 상을 받은 가타야마 탄(堅山坦)의 <구(邱)>작품과 소재나 구성, 표현 방식이 비슷하다. 두 작품 모두 커다란 수수를 배경으로 엄마가 아이를 데리고 돌아오는 장면을 담고 있다. 그때 운보는 20대의 젊은이였고 가타야마 탄은 40대의 완숙한 화가이자 심사위원이었다.
운보를 이당의 수제자라고 부르는데 어떻게 글씨체나 그림의 스타일이 이당과 다를까. 그래서 나온 말이 ‘운보가 이당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천부적인 재능으로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운보의 이력에 노다 규호를 대입하면 저절로 이런 의문이 풀린다. 운보의 삐딱한 글씨도 노다 규호의 글씨를 닮았다. 그때 그게 일본에서 유행이었다. ‘청록 산수’라는 게 우리에겐 없었지만, 그때 일본엔 많았다.
이당은 더 한 케이스다. 이당은 ‘어느날 갑자기 인사동에 나타나서 그림을 그렸더니 천재가 나타났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갑자기 서화미술회에 들어가서 20여 일만에 고종 어진을 그린다. 이게 가능한 얘기일까. 말대로 ‘22일만에 심전 안중식에게서 배우고 어진을 그렸다’면 그림에 심전풍이 나와야 한다. 그런데 이당이 그린 고종의 얼굴은 일본식 초상화다.
처음에 국내 화단에 등장하는 대목에서 나타났을 때 이당은 ‘그림 배운 적이 없다’고 말했는데, 그가 젊은 시절, 실은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 화가에게서 배웠다고 봐야 한다.
고암 이응노도 엉터리 이야기를 남겼다..
고암은 젊어서 전라도의 송태회에게 배우고, 서울에 와서 해강 김규진에게 배웠다. 그럼에도 자기 이력에서 송태회를 지워버렸다. 또 요즘 전시회에 가면 고암이 한국 풍경을 그린 수채화 비슷한 기법으로 그린 1930~40년대의 작품이 많이 등장한다. 전통 한국화와는 다른, 맑은 수채화감각의 묵 그림이다.
그런데 1930년대 그의 전시 리플렛을 확인해보니 전시회 제목이 <고암 이응노, 신남화전>였다. 신남화는 일본식 용어로 서구의 영향을 받아서 수채화처럼 맑게 간략하게 그린 걸 신남화라고 한다. 그런데 전시회 제목을 신남화라고 했다는 것은, 당연히 일본 신남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뒷날 이런 얘기를 일절 하지 않았다.
한가지 덧붙이자면 국내 화단의 1세대 서양화가 중 일본 ‘가와바타 미술학교’ 출신이 꽤있다. 여기는 사설 학원이다. 정규 학력으로 이력서에 기록하면 안 되는 곳이다. 한국에서 유학을 가면 바로 정규 미술학교에 갈 수 없어서 가와바타에서 3개월/6개월/1년 코스 공부하고 대학 입학시험을 봐야했다. 김병기 선생도 가와바타를 다닌 뒤 문화학원에 입학했다. 그런데 해방 뒤 한국에서는 ‘가와바타 학원’에 다닌 기록만으로 대학교수를 지낸 이도 많다.
김기창 <엽귀(饁歸)>1935, 비단에 채색, 170.5 x 109 cm
가타야마 탄 <구(丘)>
-이런 연구에 뛰어든 계기가 있을 것 같다.
이 책에 실린 글 중 맨처음 쓴 게 가토 쇼린과 도쿠다 교쿠로(德田玉龍)에 대한 글이다.
1999년 일민미술관에서 열린 <와유금강전>에서 ‘옥룡’이라는 작가의 금강산 그림을 봤다. 이듬해인가 덕수궁미술관에서 <금강산전>이 열렸을 때 그 작품이 또 나왔다. 도록에 옥룡을 ‘한국 사람 임신’이고 호가 ‘일만이천봉 주인’이라고 소개했다. 그런데 그 그림은 한국 사람이 그린 그림이 아니란 느낌이 들었다, 한국 사람에게서 나올 수 없는 그림이었다. 게다가 수묵화라고 분류했는데 보면 알겠지만 그건 판화였다.
여기에 의문을 품고 이 작품에 대해 알아보게 됐다. 일제시대에 금강산 사진집이 많이 발행됐고 인기가 많았다. 그 중 덕전사진관이란 곳에서 펴낸 금강산 사진집이 베스트셀러였다. 그런데 덕전사진관이 발행한 금강산 사진집에 ‘옥룡’의 그림이 꼭 들어가 있었다. 책 판권을 보니 발행인이 ‘도쿠다 도미지(德田富次朗)’였다. 추적해보니 도쿠다 도미지의 호가 ‘옥룡’이었다. 본명은 도쿠다 도미지, 작가로 활동할 때 쓴 이름은 도쿠다 교쿠로였다. 그의 작품 중 ‘이왕가 소장품’인 작품이 있었는데 그 작품에 찍힌 도장을 보니 이름이 옥룡이고, 도장에 ‘덕전(德田)’이라고 찍힌 것을 발견했다. 앞뒤가 맞았다. 그래서 ‘덕전옥룡=덕전부차랑’이란 결론이 나왔다.
그래서 이런 사실을 바로잡기 위해서 도쿠다 교쿠로에 대한 글부터 썼다.
그 다음으로 가토 쇼린(加藤松林)에 대한 글을 썼다. 세상 사람들이 욕할 것 같아서, 한국을 지나치게 사랑한 사람부터 쓰자고 해서 찾아낸 게 가토 쇼린이다. 가토 쇼린은 한국에서 시미즈 도운으로부터 그림을 배웠고 선전 심사위원을 지냈다.
그의 모든 그림은 한국을 소재로 하고 있다. 나는 일제시대에 한국에서 제일 열심히 활동하고 한국을 제일 사랑했던 사람이 가토 쇼린이라고 본다.
-조선에서 활동한 일본 화가에 대한 글을 발표한 뒤 국내나 일본에서 어떤 반응을 보였나.
가타야마 탄은 일본에서는 거의 잊혀진 화가였다.
그러다 내가 그의 작품 <구>를 발굴하고 그에 관한 글을 두 편 발표한 뒤 일본에서 가타야마 탄을 재인식하고 미술에서 한일관계를 얘기할 때 제일 유명한 화가가 됐다. 자료를 조사하고 글을 쓴 보람을 느끼게 하는 인물 중 대표적인 작가가 가토 쇼린과 가타야마 탄, 도쿠다 교쿠로이다. 이들에 대한 글을 쓰고 2~3년 지나서 도쿠다 교쿠로의 유족이 연락을 해왔다. ‘아버지의 활동에 대해 글을 써줘서 고맙다’는 것이다.
국내에서는 일제시대에 조선에서 활동한 일본 화가에 대한 연구를 좀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없지 않았는데 최근 2~3년 사이 시각이 바뀌고 있다. 2018년에는 부산미술관에서 이를 주제로 전시를 열기도 했고 그 전시의 기획에 참여하기도 했다. 역사박물관에서 그때 활동한 일본 화가 두 명의 도록을 내기도 했다.
우리 역사박물관에서 두 명의 도록을 냈다. 일제시대 그림으로 조선총독부에 부역한 것과 그 시대 팩트의 확인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내가 책의 맨 앞과 맨 뒤에도 썼지만 당시 조선에서 활동하던 일본 화가들이 일본 제국주의의 방편으로 그린 것도 있지만, 순수 민간 차원에서 작업한 것도 있다. 순수하게 조선에 대한 애정으로 그린 것은 우리가 함부로 이야기하면 안된다.
그는 <일본 화가들 조선을 그리다>라는 책이 “이건 일종의 한일문화교류사의 사초”라고 정의했다. 책의 부제목도 ‘일제 강점기 한일문화교류’다. 오랜 고립 정책 끝에 나라가 망한 조선은 일본을 통해 서양의 근대를 수입했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팩트다. 어느날 갑자기 봉건 조선에서 현대의 한국으로 이어지는 게 아니다. 그가 일본에서 조차 자료가 남아있지 않은 잃어버린 고리와 잊혀진 인물을 더 찾아내는 데 의욕을 보이고 있다. 그의 작업이 진척될수록 우리는 한국 근현대 화단의 형성기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도판이나 실물 작품, 당시의 언론 보도 등 ‘실증 자료’를 통해 알 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