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전당/태광그룹 선화예술문화재단 제작
석문 및 해제: 이완우, 김상환 2014~2016년 간행
[석문](오른쪽) 惟昔始祖 鄒牟王之 創基也出
(왼쪽) 自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
그러나 제아무리 인격, 품성이 뛰어나다 해도 서예에 수련이 필수적이다. 조선시대의 명필들 역시 그랬다. 몽당붓이 무덤을 이루고 벼루 밑창이 뚫어진 것이 몇 개라고 했다.
수련의 길은 크게 두 가지였다. 왕희지 같은 명필의 법첩을 베끼는 길이다. 두 번째는 고대의 석비 탁본을 따라 쓰는 것이다. 전자는 주로 추사 이전까지 방식이다. 중국에서 건너오는 법첩은 복각에 복각을 거듭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통일신라 김생(金生)필 낭공대사탑비(郎空大師塔碑) 탁본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 1705-1777)에 대한 추사 비판의 출발은 이 불완전한 법첩에 있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 점에서 추사체의 완성에는 북경 직수입의 선본(善本) 북비탁본에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근현대 한국서예가들은 무엇을 본을 삼아 수련을 했는가. 조선시대 전래의 왕희지 법첩인가 아니면 추사 인연의 북비 탁본인가. 모두 아니다. 어느 서실(書室)에 가도 볼 수 있는 학습서는 따로 있다.
고려 이암(李嵒)필 문수사 장경비(文殊寺藏經碑) 탁본
일본 니겐샤(二玄社)에서 나온『서적명품총간(書跡名品叢刊)』이다. 최고의 석각인 석고문(石鼓文)부터 유명한 중국 석각, 석비, 명필들의 글씨를 총서로 꾸며 208권이나 낸 시리즈이다. 이 총서는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였다. 해방후 줄곧 모든 한국 서예가들은 이 총서를 옆에 놓고 글씨를 익혔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추사시대에도 북경에서도 탐내는 고(古)신라의 비가 있었다. 그 외 안평대군, 한석봉, 추사 같은 조선시대 3대 명필도 있다. 하지만 서예가들이 옆에 놓고 베껴 익힐 수 책자 형태로는 나온 것은 극히 적었다.
황기로(黃榮老 1521-1567)필 초서가행(草書歌行) 석각과 탁본
[석문] 少年上人 號懷素 草書天下稱
태광그룹이 세운 선화예술문화재단은 이 황무지에 한국명적총서를 간행했다. 2014년부터 시작해 금년 가을 2차본까지 10권이 간행됐다. 서예연구가 이완우씨와 한문학자 김상환씨가 석문과 해제 등을 맡았다. 장황하지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권-고구려 광개토대왕비,사택지적비, 3권-진흥왕순수비, 4권-통일신라 김생 낭공대사탑비, 전유암산가서, 5권-통일신라 최치원 진감선사비, 6권-고려 탄연 청평사문수원기, 7권-고려 이암 문수사장경비, 봉하시 등, 9권-조선 이황 퇴도선생필첩, 10권-황기로 초서가행 초서차운신, 11권 조선 한호 천자문, 13권-윤숙 고시서축이다.
이 가운데 2권-백제 무령왕릉지석, 8권-조선 이용 몽유도원기, 소원화개첩, 행초육폭, 12권-허목 척주동해비, 14권-이광사 화기, 원교법첩, 15권-김정희 묵소거사자찬 예서대련은 3차 배본으로 작업중이다.
한호(韓濩 1543-1605)필 천자문
일본 니겐샤 얘기를 좀 더 하면 이 회사는 10년 더 이전부터 사업 종목을 하나 늘렸다. 자동차관련 서적의 출판이다. 일본도 서예인구가 감소추세로 접어든지 오래여서 서예책이 안팔린다는 것이다.
그런 마당에 선화문화예술재단이 이 사업에 나선 것이다. 엉터리 문화재단이 횡행하는 현실 속에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해주는 공익재단의 사업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y)
(*이 총서는 선화예술문화재단이 자금을 지원하고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이 머리와 품을 들여 공동 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