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용진, 그 사람 그예술
가나문화재단/2015년8월
금년은 해방 70주년 되는 해다. 근세에서 근대로 이어지는 굴곡의 역사를 마감하고 스스로의 손으로 근현대를 만들어온 지 70년이 된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이는 해방이후 미술이 걸어온 70년의 길과 같다. 70년이면 사람은 나서 청장년을 거쳐 노년에 접어드는 세월이다. 경우에 따라서이겠지만 이쯤 되면 노성한 연륜에서 노련미가 생기는 것은 물론 노회한 지혜가 드는 일도 흔치 않게 된다. 세상을 보는 눈 역시 전처럼 그렇게 단순하거나 직선적이지 않게 된다. 둥글둥글해져 앞을 보는 듯하지만 옆을 보고 있으며 또 뒤에도 눈이 있는 것처럼 말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된다.
2014년 제주도에서 보여준 작가의 손
이런 노성한 눈으로 지난 70년의 한국 근현대 미술을 되돌아보면 눈에 핏발이 설 정도로 심각했던 일도 ‘그때는 그랬었지’ 하고 말할 수 있게 된다. 해방직후 理想의 근대사회를 꿈꾸면서 둘로 나뉘어 치고받았던 좌우 분열, 대학이 나선 미술계 헤게모니 싸움, 해외미술전 참가와 놓고 이전투구를 벌였던 협회장 선거 그리고 체제파와 반체제파의 대결 등등의 갈등과 대립도 그렇다. 지금은 내막이 밝혀지고 또 의도도 뻔히 드러나 유치하게 되고 말았지만 이런 갈등 역시 지나온 시대를 재구성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역사임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이처럼 눈에 보이는 사건(?)말고도 미술계는 일종의 脫콤플렉스 같은 대사건을 이 기간에 어쨌든 겪어냈다.
<무제> 1963년작
서구 조형사조에의 편입 문제이다. 글로벌리즘이란 말조차 식상해진 요즘, 세상은 리얼타임으로 연결돼 있어 모더니즘 시대와 같은 지역 편차(偏差)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되돌아보면 제1세계가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던 그리고 포스트포스트 모던까지 유유히 걸어왔던 길을 세계의 변방에 어정쩡하게 붙어있던 한국은 전속력으로 달려 이제사 겨우 어깨를 비슷하게 할 만큼 된 것이다.
<서있는 돌> 1994년
그런 점에서 해방 70년 미술의 역사는 한편으로 보면 모더니즘 불모지에서 포스트포스트 모더니즘까지를 따라붙는 배속(倍速) 내지는 가속(加速)의 시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간의 흔적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는 각자마다 다를 것이다. 그 가운데 미술사의 장본인인 작가가 개인적으로 겪은 삶 또한 보다 냉정한 시각의 시대 정리에 필요한 중요한 기초자료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근래 공공기관에서 원로작가의 디지털 아카이브를 정리하려는 프로젝트를 발동한 것도 같은 발상이라 말할 수 있다.
<돌 하나> 2005년
가나문화재단이 두 번째로 낸 모더니스트 조각가 한용진의 기록 역시 기본 취지는 동일하다. 모더니즘 정착의 입구에서 동양3대 비엔날레 중 하나를 개최하고 세계적인 현대미술 아티스트들이 주목하는, 어엿한 현대미술의 나라로 발전하는 동안 다양한 미술 현장을 살았던 인물들이 어떤 삶의 궤적을 보여 왔는가를 가급적 자세히 남기겠다는 기획의 두 번째 결실이다.(첫 번째는 2014년 초에 나온 『우당 홍기대, 조선백자와 80년』이다)
<하늘우물>(앞쪽)과 <무제>
그런 점에서 이 책은 흔히 보는 작가론을 다룬 책과는 다르다. 따라서 수 천 년에 이르는 한국의 돌 문화 정서가 모더니즘 조형이론과 어떻게 접목되는가 하는 얘기는 거론하지 않는다. 그보다 금년 82살을 맞이하는 老조작가가 살아온 길을 아주 가깝게 주변에서 지켜봐온 이들이 작은 사실과 에피소드로 엮어 재구성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제주 돌조각전 전시모습, 2012년
키가 큰 작가는 16살 중학시절 ‘배구를 할 것이냐 조각을 할 것이냐를 택하라’는 스승(박승구)의 제안에 조각을 택했고 이후 60년 넘게 돌만 만지는 조각가로 일가를 이뤘는데 그 과정이
최명 서울대 명예교수가 ‘큰 돌쟁이’라고 쓴 개인적 교류기와 김형국 서울대 명예교수가 구술을 바탕으로 쓴 작가 일대기를 통해 정리되고 있다. 아울러 150여점에 이르는 그의 주요작을 모두 망라해 놓아 언젠가 본격적인 작가론을 대비한 기초자료로서의 역할도 자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