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우리 문화의 꽃 진경문화』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엮음/현암사/2014.10
이름이 사물의 성격을 말해주듯이 시대도 명칭으로 인해 인상이 분명해진다. 하지만 시대가 있다고 해서 명칭이 저절로 뒤따르는 것은 아니다. 조선 전기에 해당하는 일본 무로마치시대 가운데 특히 15세기 후반 교토에서 배태된 문화를 흔히 히가시야마(東山) 문화라고 한다.
이때는 오닌의 난이 일어나 장군가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시대였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새롭게 무사 계급과 서민층이 부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 사이에 다양한 문화가 싹트고 있었다. 밋밋하던 이 시기에 은각사의 담벼락 같은 무채색의 정신성을 입힌 것은 한 역사학자였다. 하가 고시로(芳賀 幸四郎)는 1945년에 『히가시문화 연구』를 펴냈다. 거기서 은각사로 상징되는 이 시대에 노(能), 다도, 꽃꽂이, 렌카(連歌) 등과 일본 고유의 문화가 시작됐고 후대에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 것이다. 시대가 먼저 있었고 작명이 뒤따랐지만 어쨌든 시대는 이렇게 해서 제 몫을 찾았다.
다른 얘기지만 1994년 미국 워싱턴 스미소니언에서 한국미술을 본격적으로 다룬 전시가 있었다. 18세기의 궁중과 양반 문화에 초점을 맞춘 전시였다. 제목은 ‘18세기 한국 미술’.부제는 ‘장엄과 소박(Splendor and Simplicity)’이었다. 그때도 18세기는 조선시대 최고의 문화융성기로 손꼽혔다. 하지만 닉 네임 같은 명칭은 없다. 조선의 르네상스나 속화의 시대 같은 말은 있었지만 한쪽에 너무 치우치거나 남의 나라 말이었다.
정선 <인왕제색> 1751년 79.2x138.2cm 삼성미술관 리움
이 시대에 이름을 붙인 것은 그보다 훨씬 앞선 1985년이었다. 이해 간송미술관이 개최한 특별전 제목은 ‘진경시대’였다. 전시에서, 진경시대는 숙종(1674-1720)에서 순조(1800-1834)에 이르는 약150년을 가리키며 이 시대에 중국 전래의 유교사상이 심화되는 가운데 조선의 고유색을 띤 시와 글씨, 그림이 창작됐다고 천명했다. 그리고 그것을 겸재 정선에서 관아재 조영석, 현재 심사정, 백하 윤순 등의 그림과 글씨로 확실하게 소개한 것이다.
처음에는 다 그렇듯이 여기까지만 해도 작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최완수 선생 문하의 소장연구자들이 90년대 들어 맹렬하게 진경시대의 내용에 살을 붙이는 작업에 매달렸다. 그리고 결과물이 쌓이면서 1998년에 나온『우리 문화의 황금기- 진경시대』(돌베개)이다.
물론 이후에도 학계의 반론은 계속됐고 내용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명청이 교체되는 과정에서 주체적 의식이 등장하는 것은 중국, 조선, 일본 등 동아시아의 보편적 현상이라는 것이다. 즉 조선시대 미술은 조선 고유색이라는 국수적 시각으로 보기 보다는 동아시아라는 국제적 시야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조영석 <현이도> 18세기중반 31.5x43.3cm 간송미술관
이 책은 간송미술관부설 한국민족미술연구소의 연구원들이 쓴 진경시대의 문화의 실체에 대한 보다 심화된 연구 내용을 일차로 담고 있다. 더해서 동아시아 보편성이란 지적에 대한 적극적 반론의 성격도 있다. 대표적인 게 강관식 교수의 글이다.
그는 ‘진경은 진경산수화 그림의 숫자를 가지고 한 말이 아니라 진경으로 상징되는 ‘지금, 여기, 우리’라는 현실적이고 사실적인 자각이 한 시대의 시대의식으로 중요하게 작동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고 하면서 또 그 속에서는 ‘국제적 보편성과 조선적 고유성이 상생적으로 융합되면서 풍격 높은 문화를 이뤘다’고 했다.
이 책에서 다루는 내용은 회화사의 내용에 한한 것은 아니다. 사상과 문화 전반이 거론되고 있으며 종이나, 의학, 조선시대의 식이요법과 같은 진경시대의 생활상의 내용도 포괄하고 있다. 1998년에 나온 『진경시대』와 짝을 해 읽으면 18세기 조선문화 최전성기의 실체를 보다 선명하고 입체적으로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다.(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