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집』
최완수 역/현암사/2014.10
18세기 조선 문예지도가 군웅할거로 짜져 있다면 19세기는 단연 영웅의 시대라 할 만한다. 그리고 그 영웅은 여느 영웅과 마찬가지로 비극적 운명의 주인공이 된다. 그는 다름 아닌 추사 김정희이다. 추사의 생애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증보개정판 표지 1976년판 표지
이 추사에 대한 연구는 사실 일본의 근대학자에 의해 시작됐다. 그는 청대학의 자료를 수집하던 중 걸리고 걸리는 추사 자료를 접하면서 그 광대무변함에 스스로 매료돼 전공을 삼고 말았던 후지쓰카 치카시(藤塚鄰)이다.
이때 그의 손에 의해 추사학을 위한 1차 자료가 상당수 정리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일본인 학자였다. 상상컨대 시각과 자료 구성과 해석의 지향점이 다를 수 있다. 이런 시각차를 극복하고 한국인의 손에 처음 시도된 1차 자료의 정리가 『추사집(秋史集)』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진흥북수고경(眞興北狩古竟) 탁본 (김정희 필) 54.8x96.0cm 국립중앙박물관
이 책은 1976년 5월에 처음 나왔다. 추사는 불행한 후반생으로 인해 자신의 손으로 많은 자료를 폐기했다. 사후에 부분적인 집성을 거쳐 남은 자료가 집대성된 것은 일제시대의 중반에 추사 동생 김상희의 5대 후손인 김익환이 편찬한 『완당선생전집』 10권5책이다.
<서결(書訣)> 부분 27.0x33.9cm 간송미술관
1976년의 『추사집』은 이 가운데 서화(書畵), 금석 관련된 글을 중심으로 하며 그 위에 유배시에 형제나 자식, 조카 등 친척에게 보낸 간찰을 번역하여 꾸몄다. 이 책은 나온 뒤 넉 달 만에 재판을 찍는 등 학계, 예원의 특대 관심을 끌었다. 그리고 7판을 거듭하면서 국내 추사연구의 기초자료가 된 것을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재종손 태제에게(與再從孫台濟)> (《완당소독(阮堂小牘)》 23쪽) 42.8x34.6cm 국립중앙박물관
그러나 시대가 지나면서 환경이 달라졌다. 우선 한문 몰이해 세대가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필생의 테마로 삼아온 역자의 연구업적이 30여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축적된 것이다. 증보판이라 할 수 있는 이 책에는 이 두 가지 내용에 대한 배려가 기본적으로 담겨 있다. 예를 들어 한 가지만 소개하면, 북청에 유배중인 추사에게 누구보다 먼저 해배의 소식을 알려온 대원군 이하응에 보낸 편지는 신구(新舊)에서 이렇게 바뀌었다.
1984년 제7판 「與石坡 興宣大院君 석파에게」
고요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는데, 보내주신 편지를 가진 심부름꾼(사자 使者)이 임금님의 말씀을 받들어 싣고 엿새 만에 도착到着하였더군요.
(...)
이 친척 형은 은혜를 배불리 입고 살아서 서울로 들어가려고 하니 역시 받들어 뵈올 날이 머지 않음을 알겠군요.
2014년10월 증보개정복간판 「석파 흥선대원군에게 與石坡 興宣大院君」
생각하고 있던 중에 보내 주신 편지를 심부름꾼(사지 使者)이 임금님의 말씀을 받들어 싣고 엿새 만에 도착하였더군요.
(...)
이 친척 형(척종 戚從)은 혜주惠州₂ 밥을 배불리 먹었는데 장차 살아서 서울로 돌아가려고 하니 역시 받들어 뵈올 날이 머지않음을 알겠군요.
(주2 소식蘇軾(1037-1101)의 혜주惠州 귀양살이에 추사의 북청 귀양살이를 비유한 말.
그 외에 이번 판에서는 수록 내용 중 추사가 쓴 원문(原文)의 원본(原本)이 남아있는 경우는 이해를 돕기 위해 컬러로 수록했다. 예를 들어 「계첩고(禊帖攷)」 「서원교필결후(書圓嶠筆訣後) Ⅱ」 「서결(書訣)」 등의 사진이다.
<난정서> 송탁 정무본(왼쪽) 팔주첩 저모본계(오른쪽)
그리고 추사가 논고를 남긴 대상이 되는 비문이나 법첩 자료도 가능한 상세하게 실었다. 특히 <난정서(蘭亭書)> 자료는 「송탁 정무본(宋拓 定武本)」 「저모본 신룡반인본(褚摹本 神龍半印本)」 「팔주첩 저모본계(八柱帖 褚摹本系)」 등을 실어 참고로 삼게 했다.
추사의 이름이 수없이 인구에 회자돼도 사실 『추사집』까지 찾아보는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동안 읽어보고 싶었으나 한자의 벽(壁) 운운했던 독서가나 추사 애호가에게는 허들이 사라지게 됐다. 지난 30년도 그랬듯이 앞으로 30년도 너끈히 이 책이 제몫을 해줄 것으로 기대해본다.(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