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열, 『이중섭 평전-신화가 된 화가, 그 진실을 찾아서』, 돌베개, 2014. 9.
한국인이 좋아하는 근대 이후의 화가를 뽑으라면 단연 탑을 차지할 작가 이중섭.
그렇지만 우리는 이중섭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을까. 이중섭은 황폐한 시절을 견뎌낸 사람들을 치유할 순결한 영혼이었고 천재적인 면모로 다른 이들의 욕구를 대리충족시켜 줄 적당한 인물이었다. 이러한 요구에 의해 허상이 덧대어져 대표 작가가 되고, 전설과 신화로 되살아나 시나 소설, 연극와 영화 주인공도 되었다. 억대의 작품 가격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실체는 사라지고 환상만 남았다. 극단적인 찬사와 비난으로 늪에 빠진 이중섭을 구하려면 그의 본 모습을 냉철한 눈으로 바라봐야 한다. 그를 둘러싼 미궁과 신화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저자의 시도는 이 책의 부제인 ‘신화가 된 화가, 그 진실을 찾아서’가 잘 말해준다. 그가 세상을 떠난 다음 남은 자들에 의해 그들의 입맛대로 만들어진 이중섭 허상을 깨고 학술적인 견지에서 모든 자료를 의심하면서 써내려갔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30년대 후반 도쿄 유학 시절의 이중섭
1916년 9월에 태어나 40년을 며칠 못 채우고 1956년 세상을 떠난 이중섭. 그의 길지 않은 생애에 대하여 그야말로 ‘정전’이라고 할 만한 책이 발간되었다. 미술사학자 최열은 원고지 4천 매 분량의 이 책 『이중섭 평전』을 통해 이중섭에 관한 많은 추측과 어긋난 이야기를 다시 꿰어맞추고, 그의 삶을 거의 완전하게 복원하였다. 이중섭의 탄생부터 죽음까지의 족적, 그리고 그의 사후 수많은 작품전과 미술관 설립, 유작 논란 등 그를 보는 사회의 시선에 대한 것까지 아울러 냉정하게 그를 되돌아본다.
학창시절 이중섭은 “타잔이란 별명을 갖고 있듯이 173cm의 늘씬한 체격이요 청년 시절에 러닝, 철봉, 수영, 권투 등 만능 운동선수였던” 인물이다. 언제나 ‘새벽부터 일어나 냉수마찰’을 했고, 대동강 스케이트장에서 열린 대회에서 1등만 하여 여학생들의 시선을 모았던 학생이었다. 그는 ‘음악학교에 진학을 권할 만큼 좋은 목소리의 소유자’로 ‘소나무여 소나무여 변함이 없는 그 빛’으로 시작하는 노래를 평생 잘 불렀다. 오산고보에 다닐 무렵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동맹휴업 등 어지러운 일들과 마주치긴 했어도 주동하는 역할과는 거리가 먼, 관찰하는 예술가연한 학생이었다. 오산고보 1학년 때 미술부에 가입하면서 이것은 미술, 음악, 체육에 모두 재능이 있던 이 학생은 미술에 평생을 바치는 계기가 되었다.
책에서는 다양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그의 일상생활을 재구성한다. 공모전에 상을 받고 예술가로서 어떻게 성장해갔는가 하는 것 외에도, 학창시절 새 교사를 짓자는 의도로 오산학교 본관 화학실에 친구들이 불을 지르고 그가 단독범행임을 한 교사에게 고백했으나 덮어졌다는 에피소드라든가, 일본 유학 시절 도쿄미술학교가 아닌 제국미술학교로, 뒤이어 문화학원으로 옮긴 까닭은 그가 민족정신이 투철하거나 관학파를 싫어하는 자유로운 기질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도쿄미술대학의 입학규정이 까다롭고 제국미술학교가 상대적으로 입학이 쉬워 그쪽으로 간 것이라는 것을 여러 증언과 자료를 통해 밝히기도 한다.
자질구레한 자취들 외에도 그의 불분명했던 생일부터 몇 차례 열었던 개인전의 세세한 경위, 사망 시점에 상황 등에 대한 기존 저술과 전해지는 이야기의 잘못을 바로잡아 이중섭의 삶에 대해 좀더 진실에 가까운 이해를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저자는 이렇게 그의 실체를 바르게 밝히고자 주력하며 오랜 세월 동안 그에 관한 자료를 모으고 빠짐없이 검토하여 퍼즐을 짜맞췄다(70여 페이지의 빼곡한 주(註)가 그 꼼꼼함을 말해준다). 주관적인 추측이나 과장, 미화를 경계하여, 이중섭에 대해 전설처럼 전해져 왔던 에피소드나 잘못된 기억들을 하나하나 수정해 채워 넣었다.
이중섭이 작업한 표지화들. 『민주고발』(1953-전칭작일 가능성 있음), 에드가 앨런 포의『황금충』(1953),『구상문학선』(1975) 등.
많은 사람들이 이중섭의 그림을 대표작 중심으로, 파편적으로, 그리고 단편적으로 감상하곤 했을 것이고, 그것은 많은 오해의 여지가 있다. 그의 그림은 그의 인생과 연결되어 맥락을 가지고 이해해야 한다. 그것이 시간과 삶의 순간에 따라 어떻게 통일성을 유지하면서 변주해 가는지 확인해야만 했다. 그는 한 번 취한 그림의 소재를 삶 전체를 통해 반복적으로 등장시켰고 이 소재들은 그의 삶과 떼 내어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렇다고 그의 드라마틱한 인생사에만 몰두하게끔 하지는 않는다. 그가 지향한 예술세계, 화가로서 어떤 고민을 하고 표현했는지 작품 세계를 구축해가는 과정 또한 분석하여 전달하고 있다.
<통영 달과 까마귀> 29x41.5cm 종이에 유채, 1954년 상, 통영. 김광균 소장.
미도파화랑 작품전 이래 대표작품으로 평가받아온 작품. 뒷면에는 표현계열의 <물고기와 아이>(1955년 1월)가 그려진 양면화이다.
본문 중간에는 그와 관련된 자료나 생전의 모습 사진 외에 작품 이미지는 자세히 설명하는 몇 작품 외에는 거의 없다. 책 뒷부분에 약 350점의 작품을 목록 형식으로 칼라로 실어서 작은 그림이나마 시기별 예술세계의 특징과 작품의 흐름을 느껴가며 감상할 수 있다. 책 두께에 겁먹지 말고 찬찬히 서술을 따라가 그의 삶에 푹 젖어 가을을 맞는 것도 좋겠다.
책 뒷부분에 실린 작품목록
“정착하지 못한 채 떠도는 유랑민 이중섭의 예술세계는 현실에서 겪는 고통 그 자체다. 행복했던 시절의 작품에도 우울이 숨쉬고, 연애 시절 간절한 사랑의 엽서그림에서도 공허함이 스며든다. 그가 쏟아놓은 모든 노래는 20세기의 영혼이다. 희망한다. 이 책이 독자에게 아름답고 슬픈 노래가 되기를. 그리고 책을 읽는 내내 그가 햇살 타고 당신의 집 앞마당에 나비처럼 환생하는 꿈을 꾸기를.”(저자 서문 중)
이 책의 초판 발행일은 2014년 9월 16일. 이중섭이 태어난 지 정확히 98년이 된 날이며, 그가 세상을 떠난 지 58년하고 열흘 된 날이다. 이 년 후 탄생 백주기가 되었을 때, 이 평전의 도움을 받아 감동적인 회고전이 열려 외로웠던 그의 삶을 위로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