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준모 지음 | 마로니에 북스 | 2014.6
전쟁이 끝난 후 1954년 12월 26일, 광복동의 한 가정집 식모가 촛불을 켜 놓은 채 잠드는 바람에 용두산 동남쪽에 위치한 판잣집들이 전소되었는데, 불탄 건물 중에 부산국악원 창고건물이 포함되었다. 부산국악원 창고 건물에는 창덕궁 선원전의 어진을 비롯한 구 황실재산이 보관되어 있었는데 4천 여 점의 황실 유물 중 3천500여 점이 소실되고 특히 어진 대부분이 잿더미가 되었다.
이한철, 조중묵 <철종어진> 1861 비단에 채색 202.3×107.2 국립고궁박물관 보물 1942호
진재해 <연잉군 초상> 1714 비단에 채색 150.1×77.7 국립고궁박물관 보물 1491호
전쟁으로 인해 수난을 겪은 수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땅의 화가들과 문화유산도 수난을 겪었다. 인민군과 국군이 번갈아 수도를 지배하면서 어느 쪽에 부역했든 모든 지식인과 예술인들이 한치 앞의 앞날을 예상할 수 없는 위태로운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고, 어쩔 수 없이 월북해야 했던 화가들, 결국 빨치산이 되어 무장공비로 죽어갈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억울한 영혼들이 있다. 부질없는 이야기지만 만일 일제강점기와 전쟁을 겪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 나라는 어떤 모습이고 우리는 어떤 문화적인 자산을 가지고 있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의문과 안타까움이 계속되었다.
정현웅 <소녀> 1928 캔버스에 유채 45×34 유족소장
선전에 입선하여 두각을 나타내었던 젊은 화가 정현웅은 광복직후 조선미술건설본부 서기장을 맡다가 전쟁이 발발하며 좌익계열인 남조선미술가동맹 서기장이 되어 9.28 서울수복으로 국군이 들어오자 월북했다. 말년에 ‘만수대창작사 조선화창작부’에서 활동하다가 1976년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대표적인 월북 작가인 이쾌대는 해방 후 좌익계열 미술인을 이끌다가 북한의 이념적 선전화 강요에 신물을 느끼고 정치성을 배제한 미술단체 조직을 주도했다. 그러나 6.25전쟁 발발 당시 병환중인 어머니 때문에 서울을 떠날 수 없어 정치적 전향을 강요받고 스탈린과 김일성 초상화를 제작했고, 서울 수복이후에는 이 행동 때문에 보복을 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인민의용군에 자원입대했다. 인민군으로 체포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는데, 미국인 소장 덕에 그림을 계속할 수 있었다. 자의로 월북했다고 알려지지만 주체미술에 동의하지 못했는지 그 이후의 활동 소식은 전해지지 않는다.
이쾌대 <군상> 1948 캔버스에 유채 177×216 유족소장
월북한 화가들 중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행적이 모호하거나 불우하게 생을 마감한 것으로 알려진다. 반인민적인 수묵화 대신 선명한 필치의 채색화를 일방적으로 요구받는 등 철저하게 당성을 요구받았던 상황에서 많은 화가들이 자신의 뜻을 꺾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남한도 그림에 붉은색을 사용했다고 당국에 불려다니곤 했으니 예술이 정치적 이념에 의해 압박을 받는 상황은 남과 북 모두 마찬가지였다고 봐야할지도 모른다.
변월룡 <판문점에서의 북한포로 송환> 1953 캔버스에 유채 51×71
일제강점기 연해주로 이주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변월룡은 레닌그라드 미술아카데미를 나와 미술학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레핀미술대학 교수로 재직했다. 1953~4년 문화교류의 일환으로 북한에 1년여 머무르면서 전후 북한의 미술교육체제를 정비하고 월북작가들과 교류했다. 김일성의 영구귀국 제안을 거부한 죄로 민족의 배신자로 낙인찍혀 북에서도 잊혀진 작가가 되었다. 2006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를 추진하고 러시아에서 작품을 반입했으나 북한과 남한정부 모두에게서 제지하여 무산되었다. 남과 북 모두에게서 외면당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수억 <유엔군병사> 1954 캔버스에 유채 116.7×80.3 개인소장
이수억은 이쾌대와는 반대로 북을 선택했다가 다시 남으로 내려온 화가이다. 1950년 전쟁 발발 당시 함흥에 있었던 이수억은 9.28 서울수복 이후 연합군이 진주하자 수도사단 정훈부에 입대하여 종군화가로 복무했다. 동생이 반공활동을 했고 아버지와 동생이 공산당에게 사살당했던 신분 때문이었다. 1952년 미군 PX에서 초상화 그리는 일을 시작하여 53년 광릉의 미 하사관학교 PX에 초상화 가게를 열어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부산에 피난 가 있는 상황에서 화가들은 가난과 절망이 가득한 속에서도 살아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무턱대고 그림을 그렸다. 그래서 1.4후퇴 이후의 부산에서는 동인전이나 단체전 등의 전시가 기획되었다. 대부분 꿀꿀이죽으로 연명하는 상황이니 그림 도구를 장만하는 것이 가장 큰 어려움이었을 것이다. 당시 미국문화원 문정관이었던 브루노가 문화원 예산으로 일본에서 재료를 들여와 50여 명의 화가들에게 나누어주었는데, 어떤 이들은 이를 아껴서 환도 후에도 사용하였다고 한다.
1952년에 열린 <제4회 대한미술협회전>은 3월1일부터 7일까지 광복동 전국문화단체총연맹 회관에서 열렸는데, 광복동 일대의 다방들(칠성, 늘봄, 녹원, 망원, 금잔디 등)에서 협회 회원들의 전시가 이어지기도 했다. 당시 미군 공보부에서 만들어 준 회식자리에서 부산화가들과 서울화가들의 알력으로 김환기 등이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김환기 <판자집> 1951 캔버스에 유채 72.5×90.3 개인소장
책에서는 당시 예술계에 있었던 일들, 전쟁을 표현한 작품들, 예술가들의 전쟁 참여 등을 자세히 기록하여, 우리가 알고 있던 수많은 화가들이 어떻게 그 역사의 현장에서 행동하고 표현하였는지 생생히 볼 수 있도록 했다.
박득순 <서울입성 UN군 도강> 1958 캔버스에 유채 29×73 개인소장
이응노 <행상> 1955 한지에 수묵담채 31.5×30 이응노미술관
전쟁이 끝난 후 국전이 재개되고, 좌익 계열의 작가들은 사라져 없고, 친일파 배격 무드도 사라져 심사위원이 되고, 폐쇄적인 운영으로 화단이 분열되고, 국가가 예술인을 통제하기 위해 문화인등록령을 시행하고, 초대 예술원이 구성되고 하는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면, 현재 미술계가 가진 여러 가지 문제점들의 출발은 이미 그때부터인가 싶다.
휴전이 된지 61년이 지났다. 전쟁으로 인한 상처가 잊혀지기에는 너무나 짧은 세월인데, 현재 우리는 마치 그런 일이 없었다는 것처럼 살고 있다. 총기로 입은 상처뿐만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고발하고 몰아가고 행동을 강요했던 우리의 과거를 그저 덮어버린 것이 지금 굴레로 남아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된다. 역사를 표현하고 기록해야 하는 예술가들이 그 전쟁에서 떳떳하였던가. 그렇지 못했다는 사실이 더욱 그 이후의 행보를 왜곡하는 결과를 낳은 것은 아닐까.
저자는 그러나 그 속에서도 전쟁을 기록하는 시대의 눈이 되었던 화가들이 있음을 기억하자고 말하며 오히려 전쟁에서 탄생한 300여점이 넘는 작품들이 산실된 것이 우리의 두려움과 무지로 인한 것임을 지적한다. 전쟁 전후의 문화예술 활동과 미술가 행적에 대한 연구가 아직도 미진한 것을 안타까워하며 이 책이 그런 연구의 시작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