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한중지식인의 문예공화국』
정민(한양대교수) / 문학동네 / 2014.5.23
후쿠오카 신이치라는 일본 분자생물학계의 신예 과학자는 탁월한 글 솜씨로 손꼽히는 베스트셀러 작가이다. 그가 세상에 이름을 날린 글 중에 생명의 신비에 관한 테마를 알기 쉬운 문체로 그리고 흥미진진하게 소개한 『생물과 무생물 사이』가 있다.
옌칭도서관에 소장된 엄성의 문집인 『철교전집』. 이 전집속에는 후지쓰카의 전용원고용지인 망한려용전(望漢廬用箋)이 꽂혀 있었다. 망한려는 경성제대시절 살던 충신동 집의 당호이다.
분자생물학하면 고교졸업이후 이과(理科)와는 영영 결별한 사람들에게는 말만 들어도 어지럼증이 날만한 분야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 딱딱한 테마를 80년대 후반 당시 분자생물학의 최고수준의 학자들이 모여 있는 뉴욕 록펠러대학에서 포스트닥터 과정을 거치면서 겪은 자신의 이국생활 체험과 새로운 연구 환경에 대한 소감 같은 자질구레한 에피소드에 버무려, 바이러스와 DNA 발견에서 시작되는 분자생물학의 연구사(硏究史)와 그리고 본론인 생명의 고유 현상을 근사하게 엮어냄으로서 뜻밖에 대형 베스트셀러를 터트렸다.
왼쪽은 『철교전집』속의 홍대용 초상, 오른쪽은 후지쓰카가 직접 베겨 그린 것.
서론이 길어졌지만 18세기 한중문인들의 교류 내용을 테마로 한 이 책 역시 두꺼운 분량만큼 다루는 주제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전개 방식에서는 후쿠오카씨처럼 보스톤의 하버드대학 옌칭(燕京)도서관에 방문학자로 초빙돼 그곳에서 자신의 관심분야 자료들과 조우하면서 그때그때 느낀 감동과 흥분을 생생하게 토로하며 독자의 관심을 몰아가면서 거창한 주제를 흥미진진하게 풀어간 이색적인 인문서이다.
망한려 서재에서 책을 보는 후지쓰카 지카시.
책의 주제인 18세기후반 중국 학계와 조선 학자들의 교류라는 테마에는 이미 괄목할만한 연구 성과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경성제국대학 철학과 교수였던 후지쓰카 지카시(藤塚鄰 1879-1848)의 연구이다. 그는 1920년대부터 이 방면의 중국과 조선의 자료를 꼼꼼하게 모아 박사학위를 썼으나 이 논문은 그 후 출판을 미루는 과정에서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며 원고 일부가 손실되고 말았다.
그의 아들이 훗날 남아있는 원고 등을 취합해 『청조문화 동전의 역사』(1974년)를 펴냈는데 실증적인 자료로 가득 찬 이 책은 추사 연구의 일급 자료인 것은 물론 조선후기 청대 문인과의 교류에 관한 한 필독의 고전이 됐다.(이 책의 한글 완역본은 2008년 과천문화원에서 펴냈다)
옌칭도서관에서 찾아낸 후지쓰카 구장본들.
정민 교수의 이 책은 『청조문화 동전의 역사』의 내용 중에서 완당 김정희가 청 학계의 태두 옹방강을 만나기 이전, 즉 전사(前史)에 해당하는 부분을 새로 발견한 자료들을 통해 보다 구체적이고 풍부하게 재구성한 것에 해당한다.
그는 하버드대 옌칭도서관에 도착한 지 두 달 뒤, 우연히 서가에서 후지스카 소장본(所藏本)인 엄성의 문집인 『철교전집』과 마주치게 되는데 그는 이를 계기로 자료가 또다른 자료를 찾아내고 불러오는 지식의 바다를 향해하게 된 것이다.
그는 그때마다 꼼꼼하게 메모하고 자료를 복사했는데 이 책의 내용은 이 같은 메모를 바탕으로 원전 자료를 소개한 것이다. 1765년 홍대용과 엄성, 반정균, 육비와의 만남에서 시작해 유금이 가져간 박제가, 이덕무, 이서구, 유득공의 사가시집 에피소드, 북경에서 글 솜씨로 이름을 떨친 박제가 이야기 등이 담겨 있다.
옌칭도서관 선본실에서 찾은 후지쓰카 구장의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관련시문집.
한문과 한시가 난무하는 거창한 테마의 글이지만 의외로 술술 익히는 것은 그곳에서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후지쓰카 구장본을 극적으로 만나는 장면들이 생생하게 묘사돼 있기 때문이다. 옌칭 도서관의 영문 모르는 사서를 앞에 두고 자료 조사에 신이 난 저자의 모습과 그 자료를 통해 재현되는 250년전 북경에서 홍대용, 박제가가 중국 문인들과 만나는 현장이 글속에 교직돼 있는데 이는 마치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한편의 회상(回想) 영화를 보는 것처럼 흥미진진하다.
나빙이 그려준 박제가 초상과 묵매도. 실물은 일본을 거쳐 2006년 자더경매에 출품돼 중국인 소장가에 낙찰된 것으로 전한다.
이 책은 무거운 주제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글 솜씨와 전개과정 등에서 분자생물학 책과 비슷한 점이 많다. 얼마만큼의 베스트셀러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점은 있다. 19세기 미술사에서 큰 몫을 차지하는 「완당 바람」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한중 교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고 그 점에 관해서는 이 책이 그 배경을 소설처럼 영화처럼 재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연평초령의모도(延平齠齡依母圖)>와 박제가 제발부분
이 책에 실린 미술사적 내용을 한마디 추가하면 그동안 국내에서는 박제가作으로 알려져 온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연평초령의모도(延平齠齡依母圖)>가 그의 그림이 아닌 점을 정민 교수가 변증(辨證)하고 있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정성공은 청나라 초에 명나라 복원운동을 주도한 사람으로 그의 부친이 일본에서 일본인 처와의 사이에 낳은 자식이다. 그는 한때 연평군왕에 봉해졌다.
정현 교수가 수집한 박제가 글씨 5종류
이 그림은 그의 어린 시절(초령)을 그린 것으로 한 때 후지스카의 소장품이었다는 이유로 의심없이 박제가의 그림으로 여겨져왔다. 그러나 정교수는 박제가가 베이징에 갈 때(4회 연행)마다 뛰어난 글씨 솜씨로 현지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 그의 글을 얻으려는 자들이 줄지어 섰다는 대목과 연관해 이 그림에 적힌 박제가의 화제 글이 어색한 점을 들어 이를 당시의 중국 직업화가가 그린 것으로 추정했다. 실제 이 책에는 박제가의 글과 그림 속 화제를 나란히 보여주고 있다.(y)
부기: 정민 교수는 하버드대 옌칭도서관의 초빙연구 생활중 후지쓰카 지카시의 소장인인 찍힌 도서 50종 200여권을 찾아냈으며 그중 일부는 2013년2월 「옌칭도서관의 후지쓰카 컬렉션」이란 제목으로 연구 발표까지 해 주목을 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