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철살인 고사성어』
김상엽 지음 | 루비박스 | 2013.12
천리마라는 말은 많이 들어봤어도, 대개 그 말이 어느 이야기에 어떤 모습으로 등장하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동양의 옛 그림에도 천리마가 종종 등장하는데 이때 말의 모습은 비쩍 말라 볼품없는 모습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이는 시대와 주군을 잘못 만나 고생하는 인재를 상징한다. 천리마는 한번 먹었다 하면 평범한 말의 몇 배를 먹는데 천리마를 알아보지 못하는 주인이 먹을 것을 제대로 주지 않으면 비쩍 마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공개龔開(1222~1304?) <수마도瘦馬圖> 원(13세기), 종이에 먹, 30x57cm, 일본 오사카시립미술관
‘백락일고(伯樂一顧)’라 일컬어지는 고사에 말을 감정을 잘 하는 인물인 ‘백락’이 등장한다. 고대 중국 역사책인 ≪전국책≫에 나오는 이야기로 잘 팔리지 않던 말이 그가 한번 돌아보자(一顧) 순식간에 값이 뛰었다는 이야기다. 말도 알아보는 이가 있어야 세상에 알려지고, 재주많은 이도 그 재주를 알아보는 사람을 만나야 빛을 발한다는 이야기다. ‘백락일고’ 또는 ‘일고지영’은 높은 사람이 한 마디 하거나 알아봐줌으로써 위상이 갑자기 높아진 경우에 쓰이기도 한다.
21세기 현대 한국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옛날과 많이 다른 모습이라고는 해도, 사람 사는 데는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 케이스가 여전히 많다. 사람들은 옛말 그른 거 하나도 없다는 말을 여전히 사용하며, 서양옷을 입고 서양먹을거리를 먹어도 여전히 삼국지를 읽고 논어를 들먹인다. 가끔 정치인들이 새해 인사를 하며 어느 책에서 찾아내었는지 사자성어를 이야기하여 자신의 지적인 면을 어필하려 노력하는 면도 종종 볼 수 있다. 텔레비전의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사자성어 문제가 여전히 등장하고, 초등학교 학생들의 한자 공부에도 고사를 곁들인 사자성어가 필수다. '촌철살인', 즉 한 자밖에 안 되는 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듯 몇 글자 안 되는 말로 인간의 본성을 예리하게 담아낸 것이 고사성어. 이 책은 하나의 고사성어를 하나의 옛 그림과 연결시켜 그 지혜들을 시각적으로 풀어내었다.
김득신 <초부난가(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 조선, 종이에 수묵담채, 24x30cm
흔히 어떤 재미있는 일에 몰두하여 시간가는 줄 모르는 것을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고 하는데
이것은 중국 고사 ‘초부난가’에서 나온 말이다. 진(晉)나라 때 왕질이 산속으로 나무하러 갔다가
두 동자가 바둑을 두고 있는 것을 구경하다보니 도끼 자루가 썩어 있더라는 이야기로,
‘난가’는 바둑의 옛 명칭이다.
흔하디 흔한 것이 고사성어 책이건만 이 책은 그런 책 중 하나가 아니다. 독자들이 『촌철살인 고사성어』를 그런 상식 책의 하나로 보고 서점 판매대를 그냥 지나쳐 갈까봐 걱정된다. 이 책의 저자 김상엽 교수는 한국회화사와 예술철학을 전공하고 문화재청에서 일하는 미술전문가로,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널리 통용되는 옛 이야기 속의 고사성어를 옛 그림과 함께 소개하여 눈과 마음에 담을 수 있도록 하였다.
자기 코를 베어서라도 정절을 지키고 싶은 여인의 결의(高行割鼻), 오랑캐가 주인이 된 세상이 통탄스럽기도 하고 우습기도 해 곡하며 웃는 이야기(哭之笑之), 북송의 문호 구양수의 [추성부] 전문을 실어 감상할 수 있도록 하기도 하였다. 주변에서 자신의 아름다움을 탐내자 자기 스스로 코를 베고(高行割鼻) 아픈 시어머니를 위해 살을 베어 드리는(劉氏孝姑) 이해할 수 없는 정절과 효도 관념에 대해 현대적인 의미를 부여해 보기도 한다. 많이 알려져 있는 사자성어의 유래를 그림과 함께 안내하기도 하고, 다소 그로테스크 한 내용들도 이해하기 쉽고 재미있게 소개하여 이런 고사에 낯선 이들도 편안하게 읽을 수 있게한 것이다. 그림 뿐 아니라 서책의 삽화나 도자기, 탁본 등에 얽힌 이야기도 실려 있어 고사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오세창, <제금산마애전각탁묵> 종이에 탁본 55.5x105.5cm
경상남도 남해군 금산의 바위에 새겨진 글자의 탁본으로 진시황 때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동쪽으로 떠난 서불에 관한 기록으로 보기도 한다. ‘서불과차’는 ‘서불이 지나가다’라는 뜻으로
동쪽으로 가면서 흔적들을 남기고, 결국 약을 구하지 못해 일본으로 도망쳐
그곳의 왕이 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책은 총 네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 ‘내 마음은 돌이 아니다’는 사랑 우정 인내 등 보편적인 인간의 감정과 관련된 고사성어를 중심으로 다루었고, 2장 ‘매화를 처로 학을 자식으로’는 옛 사람들의 풍류와 은둔의 정신을 엿본다. 3장 ‘국가의 불행은 시인의 행복’은 용맹, 신의 등 국가와 민족에 대한 충성과 의리를, 4장 ‘구름으로 달을 드러내다’에서는 예술과 세계관에 관한 내용을 중심으로 구성하였다.
한 권 읽고 나면 새해에 지인들에게 그럴 듯한 덕담의 편지를 고사와 함께 적어 보낼 수도 있을 것 같다. 출퇴근길에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작은 문고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