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관수도원으로 돌아온 겸재정선화첩]
돌아온 문화재총서 1 -국외소재문화재재단편 |(주)사회평론아카데미 | 2013.11
2005년에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에서 왜관수도원으로 영구대여 형식으로 돌아온 《겸재정선 화첩》은 해외에 나가있는 우리나라 문화재의 환수라는 측면과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화가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의 작품이라는 이유에서 커다란 관심을 받았다.
국외문화재의 실태 파악이나 환수 등을 목적으로 설립된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사장 안휘준)은 환수문화재의 첫 번째 학술총서로서 《겸재정선화첩》의 소개와 학술적인 연구 등을 종합적으로 다룬 『왜관수도원으로 돌아온 겸재정선화첩』을 발간하였고 아울러 화첩 원본을 살린 영인본을 함께 제작하였다.
이를 기념하여 ‘고국으로 돌아온 《겸재정선화첩》’이란 제목 아래 《겸재정선화첩》은 국립고궁박물관 ‘왕실의 회화실’에서 2013년 11월 26일(화)부터 2014년 2월 2일(일)까지 매주 화요일마다 한면씩 교체되며 전시된다. 영인복제품 역시 함께 전시되어 화첩의 전체 규모를 확인할 수 있게 하였다.
《겸재정선 화첩》은 1911년과 1925년 두 차례 선교의 목적으로 한국을 방문했던 독일신부 노르베르트 베버(Norbert Weber, 1870-1956)에 의해 수집되었던 작품들로 여겨지며 1975년에 전 이화여자대학교 교수이었던 유준영 박사에 의해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되었고 『謙齋 鄭敾-한국의 미①-』(정양모 책임감수, 중앙일보사, 1977년 초판발행) 등에 일부 작품들이 게재되면서 연구 대상이 되었다. 이후 이 화첩의 중요성을 인지한 선지훈 신부의 노력으로 환수되어 왜관수도원에 소장되었으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기탁 보관되었다.
《겸재정선화첩》에는 <금강내산전도(金剛內山全圖)>, <만폭동도(萬瀑洞圖)>, <구룡폭도(九龍瀑圖)> 등의 산수화와 공자(孔子)의 <행단고슬도(杏壇鼓瑟圖)>,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의 <부강정박도(涪江停泊圖)>, 임포(林逋, 967-1028)의 <고산방학도(孤山放鶴圖)> 등의 고사인물화 등 총 21점이 수록되어 있다. 격조가 뛰어난 작품을 비롯해 누군가 대작(代作)한 작품 그리고 분명한 안작(贋作)으로 보이는 작품 등이 포함되어있다.(안휘준의 「돌아온 문화재 어떻게 할 것인가」참조)
그 중 내금강산의 실경을 그린 <금강내산전도> 등은 진경산수화의 대가로 알려졌던 정선의 개성 있고 격조 있는 산수화풍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금강산의 넓은 지역을 대상으로 한 <금강전도> 등에서 정선은 V형이나 원형구도를 이용해 토산과 암산을 대비시켜 주제를 강조하는 구도를 취하였다. 내금강산을 대상으로 한 <금강내산전도>에서도 부드럽고 습윤한 토산과 토산에 감싸인 날카롭고 강한 수직준의 봉우리들을 시각적으로 대비시켜 장엄한 금강산의 형세로 드러내었다.
그리고 평원으로 바라본 화면 상단의 비로봉 등과 심원으로 깊이감을 강조한 봉우리 등의 여러 경물들은 전체적으로 부감시(俯瞰視)로 재구성되었다. 구도나 시점 등의 재구성을 통해 내금강산의 넓은 지역을 웅장하면서 조화롭게 담아내었다.
정선, <금강내산전도>(《겸재정선화첩》), 견본담채, 33.0x54.3cm, 왜관수도원소장
임포의 <고산방학도> 등의 고사인물화에서도 정선은 구도의 운용이나 필묵법의 활용 등에 있어서 뛰어난 솜씨를 발휘했음을 보여주었다. <고산방학도>는 서호에서 은거했던 임포의 고사를 담아내어 한가로운 은거의 즐거움을 지향한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설산을 배경으로 곁에 시동을 둔 처사(處士)는 막 꽃이 피고 있는 매화나무에 기대어 하늘로부터 날아드는 백학을 바라보고 있다. 전체 화면은 전경의 둔덕과 배경의 주봉 등에 의해 크게 나뉘었는데 전경에서 지그재그식으로 배치된 암반 등의 경물들은 화면에 운동감을 주고 있다. 배경의 잡목 등을 생략해 단순화시킨 구도는 매화나무나 인물 등의 주제를 강조하였으며 주인공과 학, 매화 등에만 가한 채색은 화면에 기운을 불어넣고 있다.
정선, <고산방학도>(《겸재정선화첩》), 견본담채, 29.1x23.4cm, 왜관수도원소장
"북송대 항주 시인 임포는 세속에서 물러나 서호(西湖) 고산(孤山)의 집 주변에 매화를 심고 평생 은거하며 지냈던 인물로 후대인들은 그를 ‘고산처사(孤山處士)’, ‘매처학자(梅妻鶴子, 매화를 부인으로 삼고 학을 자식으로 삼았다)’ 등으로 불렀다. 지조를 지키며 고아한 삶을 지향했던 선비들은 속세의 더러움을 모두 덮어버린 설산에서 평생 은거했던 임포의 모습에 자신의 의지를 투영하길 좋아했다. "
『왜관수도원으로 돌아온 겸재정선화첩』에는 《겸재정선화첩》수록 작품에 대한 설명과 《겸재정선화첩》을 계기로 환수문화재의 활용 등의 문제를 다룬 글(안휘준)과 《겸재정선화첩》의 발견과 이를 국내로 돌아오게 했던 일련의 과정 등을 다룬 글(유준영, 선지훈)들이 수록되어있다.
문화재 환수라는 의의와 이의 활용과 문제점 등에 생각하고 지향할 방향성들을 제시해 주었다는 데에 커다란 의의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겸재정선화첩》에 수록된 산수화(조인수)와 고사인물화(박은순) 등에 대한 학술적인 연구논문들 역시 『왜관수도원으로 돌아온 겸재정선화첩』이 《겸재정선화첩》에 대한 학술적인 목적과 성과를 종합적으로 담아낸 글임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