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임 지음| 산처럼 | 2013.10
안견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1447년 견본담채 38.6x106cm 일본 덴리대학교
몽유도원도.
이 그림을 보기 위해 2009년 가을, 국립중앙박물관 앞에는 긴 줄을 서서 몇 시간이나 입장 순서를 기다리는 인파로 북적였다.1986년 경복궁의 국립중앙박물관 개관 전시회, 1996년 호암미술관의 조선전기 국보전에 이어 세번째로 고국에 온 이 그림을 1분도 채 안되는 시간동안 눈에 담을 수있었지만 그럼에도 불평불만 할 수없었던 것은 눈 앞에 펼쳐진 안평대군의 꿈, 도원을 마주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평대군의「도원기」 전문
1929년『동양미술』에 처음 소개된 몽유도원도와 나이토 고난 교수
세종조의 문화 예술의 집약체인 이 작품은 계유정난때 안평대군이 희생되면서 자취를 감추었는데 1929년 일본학자 나이토 고난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아 작품을 소장하고 있었던 사람은 오사카의 사업가 소노다 사이지 였는데 감정과 평과를 받아볼 요량으로 교토대학에서 정년퇴임한 나이토 고난 교수를 찾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이미 1893년 일본 정부에 등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우수예술품이라는 인증서인 감사증 까지 첨부되어 있었다고 하니 일본 정부는 이 서화의 존재를 이미 인지하고 있었고 가치 또한 인정했던 것이다. 이 감사증은 메이지 유신의 선봉을 담당했던 시마즈 가문의 한 사람에게 발급된 것으로 이 가문이 원래 소장자였던 것이다. 나이토 고난 교수에 의하면 임진왜란의 획물일 것이라고 한다.
몽유도원도는 안견이 그림을 그린 1447년 4월부터 계유정난으로 안평대군이 희생된 1453년까지 6년간 세상에 존재했고 그 이후 오래도록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안평대군에 대해 언급하는 것 조차 금기사항이었으며 재산또한 적몰되었다. 소장품 또한 파괴되었는데 단종실록에는 세조가 보지도 않고 모두 불태워 버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 와중에 몽유도원도는 기적처럼 사라남은것이다.
몽유도원도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것은 정난 당시 관에서 적몰했든가 또는 안평대군의 저택이나 별장에 빼돌려 보관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적몰됐다면 궁궐의 내탕고에 들어갔을것인데 성종 때 임금이 안평대군의 글씨를 보고 싶어 했지만 내탕고에 없어 시중에서 구입했다고 하니 적몰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무엇보다 정치에 뜻을 두지 않겠다는 안평대군의 결의를 보여주는 서화이면서 계유정난의 주역들이 참여한 몽유도원도를 왕실에서 보관했을리 만무하다.
김석신, <담담장락도>, 간송미술관
안평대군 시대에서 300년 후 담담정을 그린 작품
많은 사람들은 평소 안평대군의 예술품을 부러워했고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는데 필요한 인물이었던 신숙주의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을 가능성도 큰데 신숙주가 안평대군의 별장인 담담정을 차지했으나 계유정난 직후 단종의 장모 최씨에게 주었다가 수양대군이 즉위한 후에 신숙주에게 주었고, 계유정난 당시 신숙주는 한양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정난 엿새 후 돌아온 신숙주가 안평대군의 소장품에 손 쓸 여지는 없었을 것이다.
안평대군이 10여년간 수집해온 서화를 보고 신숙주가 기록한「화기」에 따르면 안평대군은 동진, 당, 송, 원, 조선, 일본에서 35명의 서화가 작품 222점을 수집했다고 한다. 고개지, 오도자, 왕유, 소동파, 곽희, 조맹부 등 역대 중국대가들의 작품과 조선화가로는 유일하게 안견의 작품 30점이 포함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소장품들이 어떤 운명을 맞았는지 기록이 남아있지 않고 이후 보았다는 기록이나 작품 또한 아직까지 행방이 밝혀지지 않아 계유정난때 모두 사라진것으로 추측된다. 그럼에도 몽유도원도가 살아남은것은 누군가 미리 손을 썼다고 생각할 수있다. 대형 서화이며 비단 장정의 두루마리 상태라 무게도 꽤 나가는 몽유도원도가 500년이 지난 지금도 온전한 상태로 전하며 1960년경 까지도 화려한 색채와 꽃술을 그린 섬세한 금채가 잘 보존되어 있었다고 하니 급하게 피신되었기 보다는 정난 이전에 안전한 장소에 잘 보존되어 있었음을 충분히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곳은 어디였을까?...
현재 몽유도원도가 수장된 덴리 대학 도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