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진욱 지음| 호메로스 | 2013-10
‘재생’ ‘부활’ ‘부흥’이라는 의미를 가진 르네상스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라는 3대 거장을 배출한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시기이다. 재미있게도 조선시대는 서양의 르네상스 시대와 연대상 일치하며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에 버금가는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오원 장승업이라는 우리역사상 훌륭하다고 평가되는 화가가 활동한 시기이기도 하다. 조선도 유럽이 겪었던 과학기술의 발전과 산업화, 이념의 갈등, 그리고 전쟁을 똑같이 경험했으나 서양의 르네상스는 조선 왕조 500년의 장구한 세월보다 먼저 문을 닫았는데 저자는 이 시기를 조선의 르네상스 시대라고 명명하고 설명을 이어간다.
저자에 따르면 조선르네상스가 19세기 말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것은 사회주도층의 사상과 대중의 의식이 한데로 어우러져 문화의 절정기를 일궈냈으며 문화예술을 국가지도층과 예술가 계급인 중인, 서민에 이르기 까지 두루 공유하고 향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르네상스는 예술가들이 교회 권력과 통치자들 재력의 영향 아래 한정되면서 결국 그 한계를 일찍 드러낸 데다 일부 특권층이 부의 과시와 명예의 징표, 혹은 부의 축적 수단으로 낮은 계급인 예술가들을 이용하고 활용하면서 화가가 자신의 예술세계를 맘껏 펼치지 못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자아낸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조선 르네상스의 비교는 화가들의 비교에서 더욱 드러나는데 “나를 만든 것도 메디치 가문이고 나를 파멸시킨 것도 메디치 가문이다”라고 말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대부분의 작품이 미완성으로 남았으니 어쩌면 불운한 예술가일지도 모르겠다. 만약 조선에서 태어났다면 선비들이 그를 마주하고 작품세계를 논하고 왕이 인정해주어 어진 화사가 되어 그 공을 인정받았다면 그의 예술세계는 훨씬 풍요롭지 않았을까?.. 책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비교되는 김홍도가 왕의 어진과 진경의 대가이면서 풍속화를 그릴 수 있었던 것은 조선 르네상스가 추구했던 시대적 배경에 예술가가 호응했다고 볼 수 있기에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보여준 아쉬움을 넘어선다.
<순화 4년명 항아리>,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재미있는 사실은 서양에서 최초로 서명을 남긴 화가는 1500년대의 화가 뒤러인데, 우리나라의 경우 황해도 배천군 원산리 가마터에서 발견된 도자기에 순화 3년(992년), 순화 4년(993년)이라는 연도와 함께 생산한 사람의 이름이 적혀있는 점이 주목된다.
<수월관음도>, 일본 가가미진자 소장 레오나르도 다빈치<성 안나와 성모자>, 루브르박물관
"<성 모자상>을 고려의 <수월관음도>에 비교하면 억지일까? 서양의 경우 종교는 기득권층의 통치 이념이였으며
그들의 신분을 유지시켜주는 하나의 수단이었던 반면 우리나라 불교는 고려시대에 전란이 일어났을때
호국불교를 자처하며 국가 운영에 뛰어들기도 했지만 신분과 상관없이 서민의 삶에 녹아들었다.(p.35)"
결국 책의 목적은 우리 문화가 대중성을 바탕으로 밑바닥에서부터 켜켜이 쌓여 왔다는 점이며 사회주도층의 사상과 대중의 의식이 한데로 어우러져 문화의 절정기를 일궈낸 것이어서 더욱 큰 가치를 지녔다는 것이다. 이는 처음 언급했던 현재 한류 속 한국적인 것은 무엇인가에대한 어려운 해답에 대해서도 다시한 번 생각해 보게 한다.
정선, <금강전도>, 1734년, 리움
(p.44)에 제작년도가 1794년으로 되어있으나 1734년으로 정정하여 표기하고자 한다.
면적인 그림을 그린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선적인 그림을 그린 미켈란 젤로의 기법은 정선의 그림에서 모두 발견되는 것은
조선 성리학의 이기이원론 사상이 미술의 기법에 활용되었기 때문이다. 사물을 직접 마주하고 그림을 그리는 진경을
원칙으로 하지만 그림을 감상하는 이의 입장에서 사물이 가장 잘 드러나는 구도를 택하여 누구도 볼 수없는 구도를
사실적으로 묘사하였으며 조선성리학이 추구하던 이념(理와 氣를 합쳐놓음으로서 이상과 현실을 함께 바라보는)을
그림의 영역에서 구현한 것이다.
서양의 100호 200호나 되는 그림에 비해 우리의 그림은 A4용지 사이즈 밖에 되지 않지만 그 속에 세상의 이치와 만물이 담겨있으며 불화를 그리거나 왕의초상을 그리거나, 여염집 아낙을 그릴때에도 대상이나 사물의 외형 못지않게 그 속에 깃든 영혼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신선의 세계를 묘사 할 때는 이상적이거나 완전한 모습보다는 늙은 노인 신선으로, 소박하고 아담한 개울이나 초가집을 배경으로 하여 친숙하게 하였다. 몇 번이고 고쳐 그리며 덧칠할 수 있는 유화로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사물의 모습을 재현하는 일은 어찌보면 우리 옛 그림의 방식보다 쉬웠지 않았을까도 생각할 수있다.
어찌보면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김홍도, 미켈란젤로와 신윤복, 라파엘로와 장승업을 비교한다는게 무리가 아닐까 싶지만 르네상스라 불렸고 르네상스라 명명할 수 있는 시기에 활동했던 화가를 통해 조선르네상스가 서양의 르네상스와 비교했을때 전혀 부족함이 없으며 조선의 문화운동은 가히 대중적이 였음을 다시한 번 확인할 수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