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희경 『아름다운 우리 그림 산책-선비정신, 조선회화로 보다』,
태학사, 2013.8
최북 <공산무인도> 18세기, 종이에 수묵담채, 31x36.1cm, 개인
공허한 산 속에 소박한 누정만 덩그러니 서 있다. 아스라한 나무, 멀리 보이는 폭포, 물안개로 텅빈 공간이 더욱 공허하다. 손가락에 직접 먹을 묻혀 그린 듯 모든 사물이 불분명하고, 진한 먹을 듬뿍 머금은 산천은 환상적이면서도 적막하다. 초서체의 “빈산에는 사람 하나 없고 물 흐르고 꽃 피나(公山無人 水流開花)”라는 제시가 쓸쓸하면서도 애틋한 감성을 자아낸다. 술을 사랑하고 기행을 일삼던 화가가 그린 인적 없는 빈산, 괴팍하고 독선적인 인생의 무상함이 투영된 자연. 최북의 <공산무인도>이다(본문 中).
조영석 <어선도> 1733년, 종이에 수묵담채, 28.5x37.1cm, 국립중앙박물관
어부 일가를 태운 배 한 척이 강물에 떠 있다. 뱃머리에 앉은 가장은 물고기를 잡아 올리는 그물망을 만드는 것일까. 입과 발가락으로 실을 고정하고 열심히 손으로 비비는 모습이 자못 진지하다. 갑판의 여인은 완성된 그물을 손질하면서 뱃머리의 사내와 담소를 나눈다. 금방 내려앉을 것 같은 지붕을 그늘 삼아 한 여인이 아이를 업었다. 귀염둥이 아이는 모든 게 사뭇 신기한 듯, 똘망한 눈빛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아이 업은 여인의 뒤편에 조촐한 상이 차려져 있다. 고기잡이로 생계를 꾸려가는 어부 일가의 소박한 일상. 조영석이 1733년에 그린 <어선도>이다(본문 中).
이암 <모견도> 16세기, 종이에 수묵담채, 73x42.2cm, 국립중앙박물관
이암은 세종의 넷째아들인 임영대군 이구의 증손으로 태어난 조선 왕실의 후손이다...(중략)..조선초기에는 왕과 종실 중에서 그림을 즐긴 인물이 적지 않았다. 세종은 묵란을 즐겼고, 정종의 4대손인 이의는 묵매를 잘 그렸으며, 선조는 묵죽에 심취했다. 이러한 왕실의 후손답게 이암은 어려서부터 유달리 그림에 재능을 보였다. 게다가 종실이라는 신분 덕에 당시 국내에 유입된 중국 걸작을 쉽게 감상하면서 역량을 키울 수 있었다(본문 中).
정선 <장안사도> 《풍악도첩》 1711년, 비단에 수묵담채, 35.7x36.6cm, 국립중앙박물관
정선 <장안사비홍교도> 《해악전신첩》 1747년, 비단에 수묵담채, 32.1x24.5cm, 간송미술관
정선은 멀리 단발령에서 바라본 금강산의 절경이 갑자기 눈앞에 펼쳐지자 감격한 듯 장안사 주위를 수려하게 시각화했다. 오른편의 석가봉, 관음봉, 지장봉은 마치 수정 같은 백색의 뾰족한 바위산으로 날카롭게 표현하고, 나무가 우거진 장안사 뒤편 흘산은 넉넉하고 풍부한 먹과 색으로 선염했다. 아치형의 비홍교는 지나칠 만큼 큼지막하다....(중략)... 그러나 무지개다리는 아쉽게도 1720년경 장맛비에 떠내려갔다. 정선이 금강산 여행을 시작할 당시인 1710년대에는 건재했지만 홍수로 무너지고 볼품없는 돌다리가 이를 대신한 것이다. 정선은 장맛비 때문에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비홍교를 그의 모든 장안사 그림에 반드시 그려 넣었다. 심지어 1747년에 완성된 《해악전신첩》에는 화제로 ‘장안사비홍교’라 강조해두었다. 최초의 금강산 여행에서 마주친 무지개다리를 보고 첫눈에 반한 것이다(본문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