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세자로 살아가기
신명호 | 임민혁 | 이왕무 | 한형주 | 이순구 | 박용만 | 심재우 | 돌베개 | 2013-04
무엇이든지 달성에 가까울 때가 가장 위험한 순간이기도 하다. 일례로 선거의 경우, 후보자는 당선자가 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했을 경우 오히려 역효과를 얻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조선의 세자라는 자리도 그러하다. 왕의 아들이라는 타이틀이 있기에 좀 더 쉽게 단독으로 후보자가 되지만 보이지 않는 후보자 또는 권력을 가진 이들에 의해 권력에서 멀어지게 되거나 목숨을 잃게 되기도 한다.
세자는 현 국왕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르게 될 미래 권력의 구심점이 되는 중요한 인물임에도 막상 세자라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선명하지 않다. 본래는 왕비가 낳은 첫째 아들이 왕위에 오르는 것이 기본 원칙이나 적장자 계승의 원칙에 따른 경우는 조선시대 왕 스물일곱 명 중 일곱 명에 불과하다. 세자에 책봉되었다고 해서 모두 왕좌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터. 세자 책봉과 왕위 즉위 과정이 순탄하게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있다.
<왕세자탄강진하도>, 1874년, 국립고궁박울관
고종 11년 고종의 둘째아들 순종 탄생을 기념하여 신하들이 하례하는 그림병풍
'왕실문화총서' 시리즈 마지막 9번째로 출간된 이 책은 왕의 아들로 태어나서 세자 책봉을 받기까지의 과정과 세자로서 받아야 하는 교육내용, 세자빈 간택, 대리청정 등 세자와 관련한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세자와 관련된 각종 의식과 절차, 변천 과정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으며 참고도판과 사진, 일람표를 첨부하여 세자의 삶을 살펴 볼 수있게 하였는데 책에 실린 풍부한 도판은 시각적인 자료가 역사에 대한 이해와 고증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한 번 깨닫게 한다.
<문효세자 책봉의례도>, 1784년, 서울대학교 박물관
1784년 8월에 거행된 문효세자의 책봉의례를 기록한 그림
세자 책봉 시기를 살펴보면 양녕을 대신해 22세 때 세자에 책봉된 세종이나 28세에 왕세제가 된 경종의 이복동생인 영조 등 갑작스러운 교체나 형제의 왕위 계승 외에는 대개 7~10세 내외에 이루어 졌다. 세자 책봉례는 공식적으로 왕의 후자임을 인정하는 중대한 행사였는데 문무백관과 종친들이 보는 앞에서 왕이 세자에게 죽책문(竹冊文), 교명문(敎名文), 세자인(世子印)을 전해줬다.
<회강반차도>, 조선 후기,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가운데 빈자리가 세자의 자리이며 맞은편에 시강원 관원들이 앉아있다.
세자로 책봉되면 동궁으로 거처를 옮긴 후 제왕 수업을 받고 각종 국가의례에 참석했는데 거처를 함부로 벗어 날 수 없었으며 정치에 직접 관여 할 수 없는 등 권한과 역할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세자의 하루는 왕과 왕비에게 드리는 문안 인사로 시작되었는데 일과 중 가장 중요한 일은 공부하는 것이다. 세자교육에는 <소학> <효경> <논어> <맹자> <중용> <대학> <대학연의(大學衍義)> <상서(尙書)> <주역> <예기> <춘추좌전(春秋左傳)> <통감강목(通鑑綱目)> 등이 교재로 이용되었는데 세자시강원 관료들에게 세 차례 강의를 들었으며 유교 경전 공부 외에 말 타기, 활쏘기 등 육예(六藝)도 연마했다.
《왕세자입학도첩》부분, 국립문화재연구소
세자가 거쳐야 했던 통과의례로는 성균관 입학식인 입학례와 유교식 성인식인 관례, 결혼식인 가례가 있는데 책봉이 먼저인가 관례가 먼저인가는 종종 논란이 되곤 했다. 관례를 치른 지 2~3년 안에 혼례를 치러 세자빈을 맞이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21세에 결혼한 철종을 제외하면 대부분 10대 초반에는 혼례를 치렀으며 왕처럼 공식적으로 후궁을 둘 수 있었다.
『숙종실록』왕세자 대리청정 절목
세자는 국왕이 국사를 감당하기 어려울 때 대리청정하기도 했는데 장성한 세자의 국정 운영 능력을 높이려는 교육적 목적도 있었지만 정국을 전환시키려는 정치적 목적으로 시행한 경우와 전란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갑작스레 시행된 경우, 세자의 정치적 지위를 안정시키려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왕조에서 대리청정을 한 세자는 7명인데 이 중 사도세자와 효명세자는 왕으로 즉위하지 못했다.
『소현세자가례도감의궤』반차도 부분,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현세자에게 시집온 강빈은 소현세자가 세상을 떠난 뒤 궁에서 폐출되었다가 시아버지인 인조에게 죽임을 당했다.
왕으로 즉위하지 못한 세자들 중에는 뒤주에 갇혀 생을 마감한 사도세자나 부친인 인조에게 독살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는 소현세자, 광해군이 폐위되자 함께 폐위되고 사사된 이지, 이복형인 이방원에게 목숨을 빼앗긴 이방석, 14년간 세자 생활을 했으나 권좌에 오르지 못한 양녕대군등 비운의 세자들도 포함되어 있다. 세자는 차기 왕위에 오를 인물이었기에 왕 다음으로 지엄한 존재이기도 했지만 현재 권력을 위협하는 존재이기도 했기에 형제가 정적이 되거나 왕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되기도 했던 것이다.
왕좌에 가장 가깝지만 멀기도 하며 때에 따라 위험하기까지 했던 세자의 삶은 제한적인 역할과 비중으로 그 동안 주목의 대상이 되지 못했지만 세자의 책봉과 즉위 등 일련의 과정은 역사를 좀 더 다양한 방면으로 살펴 볼 수있게 한다. 2인자에서 1인자가 되기 까지의 과정을 설명한 이 책은 왕에게 집중되는 역사속에서 왕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갖게 한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