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문과 고려미술관
정조문․정희두 | 다연 | 2013-4
“일본의 지식인은 조선의 문화재를 매우 즐기고 아름답다고 극찬하는 반면에
그것을 만들거나 전승해 오는 조선이나 조선 사람을 멸시하는 모습에 빠져있다.”
일본의 역사 깊은 도시 교토에 위치한 고려미술관은 일본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진 조선미술 전문 미술관 이다. 다른 해외 미술관에서도 우리 유물을 소장하고 있고 전시되기도 하지만 고려미술관의 소장품 1700여점 전부가 한국에서 일본으로 넘어온 미술품이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고려미술관 전경
고려미술관을 설립한 재일동포 정조문은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여섯 살에 부모를 따라 일본으로 간 후 한 번도 귀국하지 않았는데 몸은 남조선에서 태어났지만 마음은 북조선에 있었기에 통일이 되기만을 염원했다. 미술관 이름이 고려를 내세운 것도 역사상 고려가 처음으로 통일된 국가를 세웠던 까닭이다.
정조문이 받은 학교 교육은 4학년에 소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할 때까지 다닌 3년이 전부였고 8살에 직물점 직원을 시작으로 항만노동, 토목공사, 인력거꾼, 하천공사장 등 노동판을 전전했다. 33살에는 교토에서 파친코 사업을 시작했는데 이를 바탕으로 선술집, 고깃집, 초밥집, 찻집으로 사업을 넓혔다.
백자호, 17세기 후반, 고려미술관 소장
고미술에 눈을 뜬 건 1955년 골동품거리에서 50만 엔짜리 조선 백자를 만나고 부터였는데 돈은 일 년간 월부로 주기로 하고 구입했다. 재일동포가 할 수 있는 일은 육체노동뿐, 아무리 좋은 것도 조선인이 만든 것은 흠집 있는 물건으로 취급받고 조선인이라 하면 임금을 떼이기도 자랑할 수도 없었는데 고미술 가게에서 가장 높은 가격으로 진열되어 있는 조선의 자랑거리를 발견한 것이다.
제 1회 일본 속의 조선 문화 유적답사 (1974. 2)
고려미술관 5층 석탑
고려시대 것으로 고베 부농의 밭에 뿔뿔이 방치되어 있던 것을 발견한 정조문이 15년 동안 찾아다녀 손에 넣은 것이다.
이때부터 임진왜란,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흘러든 미술품을 수복하겠다는 집념으로 일본 속의 ‘조선’을 모아 조선의 자랑스러움을 보여주고자 결심했다. 일본에서 한국인으로 살며 겪어야 했던 고난을 한국미술품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그리고 재일동포가 차별 받는다는 것에 대한 반발심은 강했지만 저항하는 것은 감정적인 소모일 뿐, 자국의 문화 예술이나 역사를 이해하는 쪽으로 쏟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 조선의 역사와 문화 연구 활동을 시작했다.
잡지 『일본 속의 조선문화』를 계간하여 고대의 조선 문화를 축으로 한 고대 일본을 보고자 했는데, 50호까지 출간된 이 잡지는 일본 역사와 유적 속에 잠들어 있는 우리의 과거를 캐는 일에 주력했다. 일본의 역사학계가 한국으로 부터의 이주민을 귀화인으로 부르던 것을 도래인으로 고쳤는데 이는 역사학계 뿐 아니라 교과서에서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좌담회를 수록한 단행본
이뿐 만이 아니라 매 호마다 독자가 궁금해 하는 주제를 가지고 전공자를 초빙하여 구체적인 토론을 벌여 일본 고대사 전공학자는 물론 일반 독자의 관심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일본 각지에 흩어져 있는 우리 미술품을 40년에 걸쳐 모아 공익재단법인 고려미술관을 설립해 재일동포에게는 자긍심을 일본인에게는 한반도 문화의 아름다움을 전했다.
책의 말미에는 고려미술관에 소장된 유물을 보고 적은 방명록 글이 실려 있는데 정조문의 생각처럼 재일동포들에게 잊어버리고 있던 고국에 대한 자긍심을 불러일으켰음을 알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일본 여행을 온 이들에게는 타국에서 만나는 우리의 유물을 통해 한국이란 곳에 대해, 우리의 역사에 대해 다시 한 번 일깨워 주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일본인들에게는 곡해되지 않은 역사를, 우리 미술품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조문은 물건을 손에 넣을 돈도 없으면서 보지 않고는 못 배기고, 보면 만지고 싶어서 안절부절못하였으며, 그것이 괜찮은 물건이다 싶을 때 손에 넣지 못하면 병에 걸리고 마는 성미라 일본의 간송 전형필이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이처럼 국내에서도 해외에서도 예술품으로 애국을 실천하는 분들이 있었기에 우리의 역사와 문화가 고리를 이어가며 전달된다는 점에서 다시 한 번 감사함을 느끼며 돌아가시는 날까지 고려미술관을 위해 애썼던 정조문 선생을 기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