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정 지음 | 이학사 | 2012-11
자율적이기 보다는 타율적이 될 가능성이 컸던 일제강점기. 예술분야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제는 서구 근대를 모방한 박물관, 박람회, 전람회 같은 시각 구조를 운영하여 문화 통치의 한 방편으로 이용했다. 그 결과 조선인 화가들이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그 제도 안에서 역량을 키워나가게끔 됐으며 일본 미술을 경유한 서양 근대미술을 무비판적으로 모방하기에 이르렀다.
조선미술전람회 관람장면(1992)
1922년부터 23년 동안 단 1회도 거르지 않고 이어진 조선미술전람회(조선미전)는 대중의 관심을 끌어 식민지 현실에 대한 무관심을 유도하는데 일조했고 식민지의 시선을 고착화 시켰다. 근대의 현모양처로 대표되는 미인상이 조선미전에서 거듭 수상했고 피폐한 조선의 현실을 두드러지게 하는 지방색의 강조는 향토적 서정주의로 변모해 화단을 주도했다. 이는 전쟁에 참가한 남성들의 빈자리를 여성이 채워야 함을, 식민지 조선의 개인은 지배권력에 의해 보호받아야 함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23회에 걸친 조선미술전람회(조선미전)을 중심으로 일제강점기의 시선과 근대의 시각매체를 분석한 이 책은 지나간 과거가 아닌 식민지 이후라는 이름으로 지속되는 과거에 대해 이야기 하고있다. 이를 통해 본다는 것이 감각적인 차원을 넘어 의식적인 차원과도 연관돼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상범, <모아한연>, 1924년, 제 3회 조선미전 입선작
일본 유학파들이 채색분야를 선점했다면 수묵분야에서는 국내파 작가들, 그 중에서 청전 이상범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입선과 3등 상을 획득한 이래 10회의 특선을 기록해 1936년 추천작가. 1938년 심사 참여 작가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고 이후 조선미전에서 청전 양식이라는 말이 돌 만큼 제자들의 활약이 활발했다. 이는 입상을 위한 전람회 양식이 화가들의 의식 세계를 지배했음을 의미한다.
김은호, <간성>, 1927, 제 6회 조선미전 입선작
1927년 당시 조선미전 심사위원으로 활약한 유키 소메이의 영향을 짐작케 하며 이후 7회 출품작 <북경소견>(특선)에서는 일본 미인도의 전형이 나타난다.
전람회의 권력은 창작 주체를 식민화 시켰는데 작가에게 있어서 조선미전은 전국적 범위로 시행된 공모전이라는 점과 입선은 사회적 입지를 확고히 할 수있었기에 사활을 걸 만한 중차대한 일이었다. 일본 유학생이 대거 귀국하는 1930년 이전까지 서양화부와 조각부에 조선인이 출품한 사례는 극소수에 불과했고 일본화와 유사한 동양화부에 집중되었는데 시서화의 일치를 근간으로 한 서화는 서양화와 대칭되는 의미인 동양화로 지칭되었으며 서예를 주변부로 몰아내고 회화를 동양화와 서양화로 양립시켰다. 동양화 계열은 수묵에서 벗어나 화려한 채색의 화조영모화나 미인화를 표현했고 산수풍경의 경우 사의적 경향을 버리고 현실 위주의 사생주의적 화풍을 지향했다.
나혜석, <정원>, 1931년, 제 10회 조선미전 서양화부 특선
나혜석의 작품 경향은 일본적 인상주의 화풍의 영향을 받은 관학파 양식이라 할 수있다.
서양화부는 그 주체가 조선인이 아니었는데 1920년 이전까지 해외 유학에서 돌아온 서양화가는 고희동, 김관호, 김찬영, 나혜석 등 4명에 불과했기에 일본을 통한 수용을 배제하면 논의가 거의 불가능하다. 이후 1930년대 중반 이후에는 급속도로 정착했는데 이는 전통성이 강한 서예와 사군자가 사라진 것과 비교된다.
조선미전의 심사위원은 대다수가 일본작가였기에 일본 관전에 종속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고 1, 2회에 걸쳐 당대 대가급 일본화가의 작품이 참고품으로 전시되어 일본화 현상을 가중시켰다. 작가 개인의 기량발휘와 창의적 시도는 조선미전에서는 낙선을 의미했기에 조선화단에 일본화풍이 침투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김은호, <금채봉납도>, 1937
친일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는 이 그림은 총독부 조선 중앙 정보위원회의 종용에 따라 조선 귀족의 처와 사회 중견 여성들이 발족한 애국금채회에서 보국 차원으로 모집한 금비녀를 총독에게 헌납하는 모습을 담았다.
문제는 전통미술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 조선미전이 끝난 해방까지 그대로 이어져 20세기 후반까지 타율적 수용에 대한 미술계의 반성을 가로막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점이다. 식민지 시대에 활동했던 작가들이 해방 이후 미술계를 주도하면서 식민지 잔재를 간과한 채 미술작품의 외연적인 면모만을 강조하게 되었다.
잘못된 인식이 바로잡힌것은 1994년 한국근대미술사학회가 발족하면서 부터인데 아직까지 일제강점기의 시각 구조에 대한 적극적인 비판과 친일 미술의 범주는 제대로 설정하지 못한 실정이다. 23회에 걸친 조선미전은 식민지 현실에 대한 폭로나 비판 대신 조선인 작가들에게 창작에 대한 나약한 태도를 은연중에 강요하였는데 이는 지금까지 이어지는 문화의 기억을 지배하는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 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