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혜 | 강민기 | 윤진영 | 황정연 지음 | 돌베개 | 2012.10
몇 해 전 『바람의 화원』이라는 책과 드라마가 인기를 얻었었다. 대중들에게 친숙한 화가인 김홍도와 신윤복을 주인공으로 하여 관심을 끌었고 신윤복의 성별이 여성일지도 모른다는 가상의 설정이 흥미를 더했다. 그로인해 배경이 되는 도화서도 화원이라는 직업도 낯설지만은 않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도화서는 화원이 소속되어 일했던 곳, 화원은 그림 그리는 일을 한 사람 정도의 정보만이 일반적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떠오르지 않는다. 좀 더 안다고 한다면 왕실에서 필요한 그림이나 행사를 그림으로 기록하였다는 정도.
영조는 충청도에서 전복 캐는 모습을 그려오라 했고 정조는 껄껄 웃는 그림을 그려오라고 명하는 등 화원이 국왕의 세세한 요구까지 실행에 옮겼다는 이야기들은 책을 통해 접할 수 있다. 결코 적지 않은 분량에 화원, 그들의 활동에 대해 담은 이 책이 읽기 전부터 기대되는 이유는 그림뿐만이 아니라 화원이라 칭해졌던 옛 사람의 삶을 좀 더 세세하게 살펴볼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일 것이다.
<도화소시화> 중 안건영, 백은배, 유숙의 그림(2점), 국립중앙박물관.
화원은 일정한 선발 과정을 거쳐야 했는데, 가장 공식적인 방법은 취재에 응시하여 통과하는 것이었으며 또 하나의 방법은 전문 화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기량을 인정받은 자가 문인관료의 추천을 통해 궁중 도화업무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조선후기부터 시행된 차비대령화원의 녹취재는 도화서 시험을 통과한 실력있는 인물들이 응시하였는데, 시험과목에 속화와 책거리 그림이 포함되어 이 그림들이 조선 후기에 본격적으로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조중묵, <함흥본궁도>, 비단에 채색, 131.5x71.5cm, 국립중앙박물관.
화사군관은 조정에 그림을 바치더라도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현존하는 지방지도와 실경도가 누구의 그림인지 확인이 어렵다. 따라서 조중묵의 <함흥본동궁도>가 지금까지 화사군관의 작품으로 유일하게 알려져 있다.
변박, <동래부순절도>, 1760년, 비단에 채색 이시눌, <임진왜란전도>, 1834년
146x96cm, 육군사관학교박물관. 141x85.8cm, 서울대학교규장각 .
변박과 이시눌은 지방화사 중 관청에 소속되어 활동한 대표적 화가이다. 변박은 동래부 무청에 소속된 화원이며 이시눌 역시 별군관청 군기감관 등 무임직을 역임했다.
화원은 역할에 따라 주관화원, 동참화원, 수종화원으로 구분되는데 당대 일류급 화원들이 주관화원직을 맡아 어진이나 궁중회화 제작을 주도 하였다. 활동 지역에 따라서는 21군데에 파견되어 도화업무를 수행한 화사군관, 도화서에 소속되지 않고 개별적으로 활동한 방외화사, 특정 지역 출신으로 그 지방관청에 소속되어 도화 업무를 담당한 화가인 지방화원으로 구분되니 화원이라는 직업안에서도 활동에 따라 다양하게 나뉘어 짐을 알 수있다.
이명기, <오재순초상>, 18세기후반, 비단에 채색, 151.7x89.0cm, 리움.
이명기는 주관화사로 전통적 초상화법에 서양화법을 적용하여 구사하였다. 정조의 어진을 그렸으나 소실되고 현재는 전하지 않고 있어 <오재순초상>과 같은 화법과 화격이었을것으로 추측할 수있다.
영조죽책함, 1712년, 나무에 옻칠, 국립고궁박물관
뚜껑에 봉황 두 마리, 몸체에는 매죽, 양 옆에는 난초를 그린 죽책함은 의궤에서도 동일한 모습을 볼 수 있어 규정화 되어 있음을 알 수있다.
화원의 임무와 역할 역시 다양한데 어진을 그리는 일을 비롯하여 각종 궁중의 행사 장면이나 왕의 종친, 공신 초상화 제작, 궁궐내부 장식화, 지도, 궁궐도, 건물의 단청작업, 중국이나 일본 사행시 수행화원의 참여하여 여러 분야에 참여하여 화업을 담당했다. 이 외에 교명이나 죽책을 넣을 상자의 겉면을 장식하거나 건물을 중건이나 산릉 조성 전에 주변의 도형을 그려 공사를 진행하기 전 기초자료를 제공하기도 했다.
17세기 이후에는 화업을 가업으로 세습하는 집안이 등장하였는데, 인동 장씨처럼 200년간 화원을 배출한 가문도 있었다. 이는 회화양식의 전승과도 관련있으며 중인층 형성에 일조했다고 할 수 있다.
세조어진을 모사하고 있는 김은호, 1935년
어진은 생존해 있는 왕을 그린 도사, 기존에 완성된 어진을 베껴 그리는 모사, 죽은 선왕의 모습을 상상해서 그리는 추사가 있다. 화원의 솜씨에 따라서는 왕의 얼굴을 그리는 주관화사, 곤룡포와 신체를 그리는 동참화사, 배경을 담담하는 수종화사로 나뉘었으며, 숙종연간 지방 출신 방외화사가 어진 도화에 참여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도화서 화원과 차비대령 화원이 주도해 나갔다.
어진제작이 화원의 임무중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국왕의 모습을 화폭에 담아야 했기에 당대 최고 수준의 화원이 동원되었고 이는 왕실미술의 권위를 높였다. 이 때문에 어진을 제작한 화사는 진분과 지위 상승을 이룰 수있었기에 화가 신분으로 가장 출세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사대부 중에서도 초상화에 재능이 뛰어난 이들이 많았으나 어진을 그리지 않은 이유는 중인화가들에 대한 신분의 자존감 때문이었다. 이를 통해 당시 예술가를 바라보는 시각이 녹록하지 않았음을 알 수있다.
장득만, 《만고기관첩》 중 <송하문동자>, 18세기, 종이에 채색, 38.0x30.0cm, 리움.
인동 장씨 화원 가문은 8대에 거쳐 30명의 화원을 배출하며 화원화의 명맥을 19세기까지 이었는데, 중국의 유명고사를 그린 장득만의 만고기관첩은 조선 중기의 고식적인 양식을 따른 전형적인 궁정화의 양식을 보여준다.
조선개국과 함께 시작된 도화서는 19세기 후반 국가정세가 불안정해지고 왕실의 권위가 흔들리면서 도화서의 기능과 체제 또한 변화를 겪었고 갑오경장에 의한 개혁과정에서 폐지되었다. 이에 따라 근대 화단으로 가면서 화가들은 수신사 화원으로 일본을 다녀오면서 사진술을 도입하거나 미술교육자로서 후진을 양성하는 등 새로운 삶을 개척하기도 했다. 이는 도화서 화원이라는 직업이 근대적 전환기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기술직 전문가로 변화된 양상을 보여준다.
화원화는 개성적인 화풍을 드러낼 수없어 화려하게만 보일수도 있고 다소 격이 낮은 그림으로 평가되기도 했지만 왕실의 품격을 시각적으로 남겨 회화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화원또한 낮은 사회적 인식속에서도 각 분야에 두각을 나타내며 인식을 변화시켰으나 다만 주목받았던 인물보다 주목받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는 점이 아쉬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