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서 보는 그림 동양화
김상엽 | 루비박스 | 2012. 9. 15
TV나 영화가 없고, 사진조차 없는 때를 상상해본다.
벽에 건 족자 속 그림은 지금 있는 곳이 아닌 다른 공간을 간접체험하게 해 주는 거의 유일한 시각적 도구였을 것이다.
서양과 동양의 자연관과 세계관은 그림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서양의 그림은 자연을 대상으로 보듯 하지만, 동양의 그림은 자연, 곧 거룩하고 아름다운 산수의 구석구석을 돌아보고 그 속에서 소요하는 자기 자신을 그려넣은 것이다.
이인문李寅文, <단발령망금강斷髮令望金剛>, 조선(18세기후반), 종이에 담채, 23.0×45.0cm, 개인소장
자연의 한 부분으로의 인간. 감상자를 그림 속으로 이끌어 자연의 일부로 만드는 그림. 저자는 이 때문에 동양화를 한 마디로 ‘들어가서 보는 그림’이라 칭한다.
단지 시각적인 경험만이 아닌, 촉각적인 가상 체험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 동양의 그림이라는 것.
저자는, 사진을 찍듯 사물이 존재하는 화면을 옮기기 위해 하나의 시점인 원근법을 적용한 서양화가 동양화에 비해 과학적이고 진보했던 방법이라고 단정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유도한다. 왜 그러해야 했는가에 대한 원초적인 질문을 먼저 던지면서 그림을 본다면 동양화의 깊이를 느끼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곽희郭熙, <조춘도早春圖>, 북송(1072년), 비단에 수묵담채, 158.3×108.1cm, 타이페이 고궁박물원
서양화와 동양화의 차이는 캔버스에 물감을 몇 번이고 덧칠하면서 유화를 그리는 방식과 붓에 묻힌 먹을 한지에 스며들게 하듯 칠하는 것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동양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베껴 그리기’의 의미를 아는 것도 중요하다. 저자는 임, 모, 방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선인의 그림을 본떠서 그리면서 그림을 익히는 것이 서양에서보다 훨씬 중요하고 또 당연했음에 주목한다. 동양의 지식구조에서는 술이부작(述而不作), 즉 서술하되 짓 않는다는 것을 중요시했는데, 이는 고전에 의미를 계속 더하여 지식을 이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과거의 것을 계속해서 덧붙여 서술해 나가면서 그 의미를 깊이있도록 하는 것이 지식 구조의 재생산이나 그림에 있어서 모두 중요했던 것.
매화서옥도, 사군자, 나무꾼과 어부, 어초문답도, 탁족도 등 다양한 제재에 대한 설명과 더불어, 서권기와 시속기, 문인화, 남종화와 북종화, 고씨화보와 개자원화전, 호와 낙관 등 동양화 감상을 위해 알아야 할 것들에 대해서 차례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전기田琦,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 조선(19세기), 종이에 담채, 29.4×33.2cm, 국립중앙박물관
한국 옛 그림에 대한 일반 교양서들이 굳이 동양화가 아닌 한국의 그림만을 논하다가 놓친 부분들을 쿨하게 인정하며 받아들였다고나 할까. 중국의 그림을 자연스럽게 우리 그림과 함께 논하여 한국미술의 특징이 더 명확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마린馬麟, <석양산수도축夕陽山水圖軸>, 남송(1254년), 비단에 담채, 51.5×27.0cm, 도쿄 네즈미술관
동양화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중국의 문화적 다양함과 복잡다단한 역사가 미치는 영향을 몇 마디의 말로 설명하는 것은 당연히 어려운 일이다. 저자는 되도록 크게 의미를 다치지 않으면서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필요한 부분을 차근차근 일러주고 있다.
개인적인 일화나 생각이 포함된 무겁지 않은 글이지만, 글을 읽어나가면서 등장하는 몇 가지 포인트를 기억해 둔다면, 박물관 회화실에 갔을 때 우리의 그림들을 좀더 따뜻한 시선으로 볼 수 있게 될 것임은 분명하다.
최근 간송미술관 앞에 몇 시간씩 줄을 서서, 열악한 감상환경을 인내하며 우리 옛 그림들을 보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자연스레 여러 의문이 생겨난다. 물론 전공자나 반드시 전시를 보아야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간간이 들리는 대화로 미루어 볼 때는 기본적인 상식 외에는 한국미술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듯한 순수한 호기심의 관람객도 다수였다.
이들이 친절하게 설명된 도록을 차근차근 읽어보지 않는다면, 그림에서 무엇을 보고 어떤 느낌을 갖게 될까. 저자는 마치 그들을 위해 쉬운 설명을 결심한 듯하다.
서위徐渭, <묵포도도墨葡萄圖>, 청(18세기 후반), 종이에 수묵담채, 166.3×64.5cm, 베이징 고궁박물원
동양화가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를 원리부터 설명하는 방법을 썼다면 다소 지루한 책이 됐을 테고, 원리와 역사를 건너뛰고 가볍게 작품만을 건드린다면 겉핥기가 됐을 것이다. 저자는 독자들이 쉽고 편하게 동양화에 다가갈 수 있도록, 그러면서도 본질은 놓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우회적인 전략을 선택했다. 삼원법, 화목(畵目) 등 이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이론과 재미있는 구체적인 이야기들을 교차하는 방식으로 풀어 나가는 것이 바로 그것. 저자로서는 많은 고민이 있었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