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싱페이 지음 | 김수연 옮김 | 태학사 | 2012. 7
서양에서 가장 많이 그려진 그림은 종교화이다. 그리고 그 대상은 말할 것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 그렇다면 동양은? 한국은 물론 중국 그림에서 압도적으로 그려진 인물은 은자다. 깊은 산속에 살면서 벼슬이나 명예 알기를 너절한 지푸라기처럼 여기는 고상한 인물들.
지운영(池運永)이 「귀거래사」의 한 장면을 그린 <무송관산(撫松觀山)>, 견본담채 26.5x30.5cm
그 고상한 인물들 중에서도 첫째 둘째갈 사람이 바로 도연명(陶淵明 4, 5세기경)이다. 그는 그까짓 쌀 닷 되 때문에 윗사람에게 굽실거리기 싫다고 두 달 반 만에 벼슬을 박차고 나와 ‘나, 돌아가련다’라고 노래한 것으로 유명하다.
정선(鄭敾)이 도연명의 「음주」 시를 그린 <동리채국(東籬彩菊)> 지본담채 22.7x59.7cm
한국의 옛 그림에도 수도 없이 도연명 그림이 전하고 있다. 이 책은 중국의 고전문학 거장이 그렇다면 이런 도연명 그림의 뿌리는 어디인가 하고 작심하고 찾아들어간 기록이다.
그에 따르면 기록에는 그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같은 육조 시대에 이미 육탐미(陸探微)라는 거장중의 거장이 <귀거래사도>를 그렸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도(陶) 역시 신출내기 은자였는지 그림으로 그려질 만큼 유명하지 않아 신빙성이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전 육탐미(傳 陸探微) <귀거래사도(歸去來辭圖)> 남조 송대 5세기, 타이페이 고궁박물원
그럼, 이를 제외한 가장 그럴싸한 도연명 그림은 무엇인가. 당나라 때 육요라는 화가가 유명한 은자 여섯 사람을 그 중 하나가 도연명이 갈포 두건에 술을 걸러 마셨다는 고사를 그린 게 있다고 했다.
전 육요(傳 陸曜) <도잠 갈건녹주(陶潛 葛巾漉酒)> 당 지본담채 28.4x247.8cm 베이징 고궁
그러나 무엇보다 ‘동쪽 울타리 밑에서 국화를 따다가. 그윽이 멀리 남산을 바라보네(彩菊東籬下 悠然見南山)’라고 하는 풍류 분분한 도연명이 제대로 그려진 것은 송나라 때 이공린이다. 특히 워싱턴 프리어미술관에 있는 이공린의 <연명귀은도>를 계기로 도연명 그림의 체계가 잡혔고 원나라에 들어서 오늘날 우리가 머릿속에 그리는 것같은 도연명像이 완성됐다는 것이다.
이공린(李公麟) <연명귀은도(淵明歸隱圖)> 송 견본채색 워싱턴 프리어미술관(7폭 중 제1폭)
그런데 어째서 송나라인가. 이에 대해 그는 우선 도연명은 생전은 물론 사후에도 오랫동안 주목을 받지 못했다고 단언하고 있다. 시는 그저 그랬고 또 공연히 객기를 부려 벼슬을 버리는 바람에 밥을 얻어먹기 위해서는 남의 집을 두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래도 술이라면 끝장을 볼 때까지 마시고 말아 당시로서도 대책이 안서는 인물로 여겨진 듯했다.
「귀거래사」에서 ‘외로운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서성인다(撫孤松而盤桓)’는 장면을 그린
이공린 <연명귀은도>의 제3폭
전선(錢選) <귀거래도(歸去來圖)> 원 견본채색 26x106.6cm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이유는 벼슬을 애써 구하지 않았으며 숨고 싶으면 숨었고 배고프면 남의 집 문을 거리낌 없이 두드렸고 배부르면 닭고기로 손님을 대접했다고 해서 사람됨이 맑고 고결하며(淸高) 기개와 절조가 있으며(氣節) 또 그 위에 참되고 순박함(眞淳)을 두루 갖추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조맹부(趙孟頫) <연명 귀거래사(淵明 歸去來辭) 원 견본수묵 27x72.5cm 타이페이 고궁박물원
원나라 때 정형화된 도연명상을 보면 대체로 머리에 갈건을 쓰고 품이 넓은 도포를 입었다고 했다. 옷차림은 풍채가 있으며 가느다란 눈에 수염이 길다. 그리고 지팡이를 짚었는데 얼굴은 대부분 왼쪽을 향해 있다고 했다.
물론 이런 정형화는 명나라와 청나라를 거치면서 다양한 변종을 양산하는 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사항은 약속처럼 지켜졌다고 한다. 꼼꼼하게 글자를 해석하고 들여다보는 문학 전공자답게 출처와 전거에 대해 지나치게 해박할 정도인데 오히려 그것이 누워서 편하게 ‘도연명 그림이란?’ 하는 독자들에게 다소 번거롭게 비춰지기도 할 듯하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