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문화총서04 조선시대 궁중회화 2 - 조선 궁궐의 그림
박정혜·황정연·강민기·윤진영 | 돌베개 | 2012.5.
궁궐의 그림을 아우른다는 것은 일단 커다란 장애를 안고 들어가는 느낌이다. 서울에 남아 있는 궁들 중 한번쯤 타본 적 없는 궁궐이 없는 만큼, 시기를 아는 것도 어렵고 남아있는 작품의 폭도 작기 때문이다. 이 책은 한국학중앙연구원을 중심으로 네 사람의 연구진이 궁궐이라는 특수한 공간과 궁중회화의 관계를 탐색한 연구서이다.
궁궐 그림은 평소에 실내 장식으로 쓰이는 그림이나 의례용 그림이 있고 그밖에 주로 왕의 개인적인 감상 용도로 소장되었던 그림들이 있을 것이다.
궁중 장식화의 대표격이라고 하면, 일월오봉도, 모란도, 장생도, 화조도, 곽분양행락도, 요지연도, 한궁도, 책가도, 백동자도라고 말할 수 있다. 이들은 장소 이동과 실내 변형이 자유로운 방법, 즉 병풍의 형태로 제작된 것이 많다. 병풍은 방풍과 방한 기능을 겸한 가구의 일종으로서도 편리하게 사용될 수 있는 좋은 시스템.
이들 장식화들은 대개 채색화이며 낡으면 다시 만들 수 있도록 실용성을 갖춰서, 반복적 사용이 가능하도록 도식화되어있다.
<일월오병병> 8첩 병풍, 비단에 채색, 162.5×365.5cm, 삼성미술관 Leeum 소장
왕이 공식적으로 자리잡을 때 그 배경인 일월오봉도는 왕의 존재와 권위를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그림이다.
오봉병이나 모란병은 예전에도 규정될 만큼 필수불가결한 의례용물건이다.
일월오병병은 해와 달 다섯 개의 산봉우리 해와 달보다는 다섯 개의 산봉우리가 중점이다. 기록상으로 적어도 1590년 이전부터 존재했으며 중국의 경우 왕권을 상징하는 대표 그림이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도끼문양 병풍이나 용 병풍 등 다양하다).
<모란도> 4첩 병풍, 비단에 채색, 각 240.3×50.5cm, 아모레퍼시픽 미술관 소장
꽃 중의 왕 모란. 왕의 곁에 모란병. 당연한 귀결인 듯하다. 모란도는 혼례 관례 등 국가적 의례에서 두루 사용되었으나 특히 혼례 연회석과 국상을 치를 때의 대표 치레그림이다. 길흉을 막론하고 의례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된 것.
흔히 십장생도를 열 가지의 장생물을 주제로 한 그림이라고 정의내린다. 하지만 십장생도가 언제나 열 가지의 장생물로 구성되었던 것은 아니며 열 가지의 장생물도 딱히 고정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는 해, 달, 구름, 산, 돌, 물, 학, 사슴, 거북, 소나무, 대나무, 영지, 천도복숭아 등 13가지의 장생물 중에 열 개 안팎의 소재가 그때그때 선택되었다. 책에 따르면 장생물 중에 열 가지를 한 화면에 구성하고자 했던 것은 한국 고유의 창안이라고 한다. 가끔 열 가지 내외의 장생물을 한 화폭에 넣은 의장이 발견되나 이를 십장생이라는 용어로 부르지는 않았다고 한다.
십장생은 고려 때부터 세화(歲畵 새해에 그려 선물하거나 붙이는 그림)의 주요 주제로, 조선 초 궁중하사 세화 중에도 십장생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아무래도 장수와 관련되다보니 궁중에서든 사가든 회갑연 등에 많이 사용되었다.
<십장생> 10첩 병풍, 비단에 채색, 210.0552.3cm, 삼성미술관 Leeum 소장.
비교적 초기의 《십장생도》는 자연에 가깝게 어우러지도록 그린 반면 제작 시기가 늦은 그림들은 각 장생물들이 병렬적 좌우대칭적 평면적인 감각이 많고, 또한 붉은 줄기의 소나무와 옹이 표현. 패턴화된 가지 끝 표현, 청록 산수 기법, 색감 등 시대 구분의 요소로 그림을 보는 것도 기억해 두면 좋을 듯하다.
곽분양행락도도 가장 흥미로운 궁중화 중 하나. 곽자의(697~781)는 당나라 현종 때 안사의 난을 평정하고 장안을 수복했던 명장으로, 공로로 인해 분양군왕(汾陽郡王)에 봉해져 ‘곽분양’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곽자의는 개인적으로도 80이 넘게 장수하고 8명의 아들과 7명의 사위가 모두 성공하여 이상적인 일생을 영위한 인물로 회자되었다. 왕실의 가족들도 그처럼 다복하게 살고 싶은 염원이 있었을 것이며 행락도(일상화)가 여기에 가미되었다.
<곽분양행락도> 전 김득신, 비단에 채색, 143.9×123.6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숙종은 연잉군 시절의 영조에게 ‘곽자의처럼 길이길이 다복하게 살아라’는 시를 내리기도 했다.
18세기까지는 왕비가 머무는 별궁에 연화도 병풍을 쳤지만 19세기에는 곽분양행락도가 이를 대신하게 되었는데, 1834년에는 규장각 화원 시험에 ‘당곽자의행락도’라는 제목으로 문제가 출제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곽분양전’이라는 역사소설이 인기를 얻었던 것과도 관련되는데, 왕세자 서적 출납 기록에도 있는 것을 보면 왕세자의 독서대상이기도 했던 듯하다. 일반 사가에서도 혼례 때 사용되는 주요 병풍이었다. 중국에서는 다양한 곳에 나타나나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혼병으로서 역할이 크다. 괴석, 모란, 학, 노루, 원앙, 오동나무, 복숭아, 대나무, 소나무 등 자연의 요소이지만 길상의 인위적인 장치가 포함되어 있다. 중국에서 기본적인 모티브를 빌려온 것은 확실하나. 생활상이 복잡하게 구성되는 등 한국적인 변용이 있다. 현전하는 곽분양행락도의 수는 30점 이상 확인되는데, 전형적 궁중화풍은 적은 편이다.
<곽분양행락도> 8첩 병풍, 비단에 채색, 144.5×49.9~53.0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9세기 후반의 전형적 화풍.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중심부는 남자 자손에게 둘러싸여 무희의 춤을 보는 곽자의, 우측은 부인과 여성, 아이들 공간, 좌측은 후원의 한가로운 정경이다.
이밖에 서왕모가 자신의 거처 ‘요지’에서 주나라 목왕을 맞아 연회를 베푼 그림인 요지연도, 선투시도법이 적용된 책가도, 아이들이 노니는 백동자도 등이 궁중화의 대표격이다.
<정묘조왕세자책례계병>正廟組王世子冊禮稧屛 8첩 병풍, 1800년, 비단에 채색, 112.6×237.0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요지연이라는 주제와 기본적인 도상은 중국에서 빌려온 것이지만 한국인의 기호를 살려 응용하였다. 육지의 ‘연회 장면’과 불보살 및 군선들이 바다를 건너는 ‘바다 장면’으로 양분되는 형식.
백자도(百子圖)는 많은 어린이들이 천진스럽게 노는 장면으로 백동자도라고도 한다. 송대 어린이 영희도에 영향받아 다산과 득남이라는 길상의 상징성을 띤다. 왕비후보의 교육 때 사용. 화제는 중국에서 들어왔지만, 놀이의 선택과 구성에는 한국적인 정서가 가미되었다. 이중 매화따기는 주로 마지막 첩에 등장하며 사자등과(四子登科) 또는 오자등과라 하여 과거급제를 상징하였다.
궁중에서 사용되었던 채색 장식화는 그 주제의 원류를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 중국의 그림들에 닿아 있다. 거의 모든 주제는 중국에서 온 것. 그러나 조선 화가들은 조선의 상황과 조선인의 취향에 맞게 변용, 독자 발전시켰다.
궁중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길상이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두드러지는 상징성은 장수와 다남이다. 궁중사람들에게 부귀나 복, 입신출세는 그다지 중요한 바램은 아닐 터. 무병장수와 부부화합, 자손번창을 가장 염원한 것이다.
장식화 외에 왕실에 의해 감상 목적으로 소용된 그림은 우리나라, 중국, 일본을 아울렀고 교화와 치도라는 목적을 띠기도 하고 예술적, 심미적 기능도 했다.
예술에 대한 호감이나 왕실의 서화 애호 취미를 보여주는데, 서화에 특별한 취미를 가지고 있던 조선의 대표적인 왕은 성종, 인조, 숙종, 영조, 정조, 헌종 등이 있다.
『오륜행실도』 중 <석진단지> 石珍斷指. 정조 命, 전 김홍도 밑그림, 1797, 종이에 채색.
<잠직도> 전 진재해, 17세기, 비단에 채색, 137.6×52.4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잠직도나 빈풍도는 군주로하여금 농사짓고 누에치는 백성들의 고단함을 깨닫게 하고자 제작한 그림. 중종, 숙종, 영조 등.
<금궤도> 전 조속, 17세기, 비단에 채색, 105.5×56.0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우리나라의 창업 고사를 소재로 그린 궁중 감상화로 <금궤도>가 있다. 인조. 삼국사의 주제로 그림을 그릴 것을 어명. 김알지의 탄생 설화로 청록산수화법으로 그려졌다.
금궤도 제문에 언급된 1636년 봄은 병자호란이라는 뼈아픈 시기 직전으로, 청이 되기 전 금나라와의 반목이 있어 금나라에 대한 우월감 표현하고자 한 듯하다.
감상에 대한 인식의 변화로 궁중에도 점차 감상용 그림이 많아졌다.
<풍죽도> 이정, 16세기, 비단에 수묵, 127.5×71.5cm, 간송미술관 소장.
선조는 이정의 대나무 그림을 소동파에 비교한 글을 남기기도 하였다.
<새참> 김홍도, 《풍속화첩》에 수록, 18세기, 종이에 담채, 27.0×22.7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정조는 규장각 차비대령 녹취재 시험에서 ‘조운선박의 점검’ 또는 ‘논밭의 새참’이라는 두 가지 화제를 출제하면서 “모두가 껄껄 웃을 만한 그림을 그리라”고 지시한 적도 있다.
한국 건축의 특성상 벽화가 많이 발달하지는 않았고 숱한 화재, 전란의 역사 속에 초기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도 드물기 때문에 남아있는 벽화는 드물다. 대개 내부 장식은 병풍이나 족자로 만들어졌고, 단청이나 천장과 창호에 그린 장식 그림 외에는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기념비적인 작품으로는 1920년 창덕궁 재건사업으로 제작되었던 대조전, 희정당, 경훈각의 벽화로, 근대 황실의 미술정책을 알아볼 수 있다.
<총석정절경도> 김규진, 1920 비단에 채색, 195 880 희정당 동쪽 벽
<삼선관파도>(부분) 이상범, 1920 비단에 채색, 184 526 경훈각 서쪽
궁중장식화는 민간으로 확대되어 주제와 양식 면에서 민화와 많은 부분이 공유된다. 궁궐의 안팎을 꾸미던 궁중장식화가 여러 경로를 통해 궁 밖으로 전해졌고, 민간 그림에 영향을 주게 된 것. 민간으로 전래된 궁중 장식화는 ‘민화’에 포함되거나 ‘궁중 민화’로 소개되었으나 1990년대 중반부터 궁중회화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궁중 장식화’와 ‘민화’를 구분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거론되었다.
저자는 이를 위해 궁중 양식의 특징을 화려하고 강렬한 채색, 평면적이고 대칭적인 구성, 치밀하고 섬세한 묘사, 명암법과 투시의 표현 등으로 뽑아내고, 이러한 특징을 잘 나타내는 궁중양식의 대표적 그림을 일월오봉도, 모란도, 십장생도, 곽분양행락도, 요지연도, 백동자도, 책가도 등으로 정리하고 있다. 장식성이 뛰어나며 왕실의 안위와 번영, 부귀와 장수 등 길상의 의미를 담은 주제들이다.
민간으로 확산된 것은 18세기 후반부터로, 서민층으로 확산되면서 점차 소박한 화풍으로 변용되었다. 특히 저자는 민간에서 제작되더라도 동일한 화법으로 제작된 것은 궁중양식, 좀더 단순화된 것이 민간양식이라고 말하고 있다.
<모란도> 19세기 말, 비단에 채색, 8첩 병풍 중 2폭 각 186.1×49.2cm,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모란괴석도> 종이에 채색, 각 125.0×44.0cm, 개인 소장.
도화서 소속의 일급 화원들이 그린 그림을 민간 화가가 베껴 그리면서 저렴한 가격에 거래되어 중인이나 서민층의 수요를 채웠다. 당시 상인과 부농 등의 신흥부유층이 있었기 때문에 장식화의 수요가 높아지고 그림 시장이 활성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18세기 후반 광통교 인근의 시전에서 그림이 유통된 기록이 있는데, 저자는 19세기 중엽 지도인 <조선경성도>에는 광통교 주변에 도화서가 있음도 발견하여 보여주고 있다.
<조선경성도> 부분. 19세기 중엽, 서울시 종합자료실 소장
궁중 장식화가 궁궐에서 실제 사용되었던 양상과 기능을 분석하고, 궁중 양식을 정립하고자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인 연구서로 흥미롭게 접근하고 있다. 민화를 감상할 때도 큰 도움이 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