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곡 최순우, 한국미의 순례자
이충렬 지음 | 김영사 | 2012. 6
사방을 둘러보면 실제 모두 만만치 않은 면면들이다. 중국과 러시아가 그렇고 또 일본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나라들에 둘러싸여 살기란 자연 고달프지 않을 수 없다. 까딱 방심하다가는 형체도 그림자도 남아나지 못하기 십상이다. 실제 역사도 그랬고.
1931년 완공 직후의 개성부립박물관 모습
그런데 역사를 공부하는 쪽에선 한국 역사를 보면 드문드문 절묘한 타이밍에 인물을 내서 기울고 흔들리는 것을 바로 잡아주었다고 감탄한다. 그것도 大자급 인물이다. 임진왜란 때의 저 이순신이 그랬다. 19세기중반 내노라하는 중국학자들을 근대 이전의 중국 학문을 마감할 때 혈혈단신으로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대천재의 소리를 들은 추사 김정희도 그렇다고 할 수 있다.
1947년 8월 개성부립박물관이 국립박물관의 분관이 된 후 제1회 분관장 회의때 사진
(뒷줄오른쪽 두 번째가 최순우, 옆이 화가 장욱진이다)
박물관 쪽에도 이런 얘기가 가능하다. 박물관은 어차피 근대 민족국가의 소산으로 탄생했는데 한국은 출발부터 늦었다. 또 당시 해방과 전쟁이 업치고 덮치면서 상당기간 불비한 여건 속에 허둥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런 박물관이 오늘날의 중앙박물관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물론 여러 사람의 공동 노력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말하기 좋게 한 사람만 꼽는다면 이 분을 빼놓을 수 없다.
부산피난시절, 직원회의 모습(왼쪽에서 세 번째가 최순우)
혜곡 최순우이다. 그는 후에 국립박물관의 분관이 되는 개성부립박물관에 1935년 3월1일자로 첫 출근을 했다. 1916년 4월생이므로 당시 나이는 만18세. 이후 1984년 12월15일 관장의 지위로 생을 마감하면서 아울러 자동 퇴관하게 됐는데 재직 기간은 무려 48년에 이른다. 이것만 봐도 산 역사, 산 증인이란 말은 결코 빈말이 아니다.
이 책은 재미저술가 이충렬씨가 한국문화를 지켜온 사람들 시리즈 ‘간송 전영필’에 이어 두 번째로 낸 책이다. 그는 이 책을 구상하고 취재하는 데 만 2년을 꼬박 소비했다. 그가 만난 인물들은 박물관이 오늘날의 모습으로 자리 잡는 과정에 거쳐 간 대부분의 인물들이다. 따라서 이 책은 해방 직전에서 1984년까지의 박물관의 역사를 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미술 베스트셀러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의 탄생지라 할 수 있는 부석사 모습
두 번째로 필자가 포인트를 둔 건은 한국 미술에 관한 한 탁월한 인터프리터의 면모이다. 그는 사실 일찍부터 말단 관리를 시작한 탓에 전문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각고면려하면서 해당 지식을 넓혔는데 그것만이 아니다. 타고난 안목의 소유자에 처음부터 탁월한 글 솜씨가 뒤따르고 있었다.
“조용하고 청초한 담벽색(淡碧色)으로 윤나는 비색 바탕과 크면서도 헤식지 않고, 미끄러운면서도 단정하고, 단정하면서도 따스한 매무새로 마치 가얏고의 옛 음률을 듣는 듯 한 병 전체의 아리따운 선이 빼어난데, 이 선이야말로 고려 도자기 동류(同類) 공통의 특유한 곡선이다.”
청자상감 운학문 매병(靑瓷象嵌雲鶴文梅甁) 높이 41.7cm 국보 68호 간송미술관 소장
이렇게 유려하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그가 해석, 서술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간송미술관 소장의 국보 청자상감운학문 매병이다. 두 번 다시 없을 이런 최순우의 글 때문에 동학의 필자들은 분루(憤淚)를 삼키며 시샘의 눈길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간송 선생 가족과의 한 때
(뒷줄 왼편부터 최순우, 둘째아들 전영우 현한국민족미술연구소장, 간송 선생,
부인 김점순 여사, 1955년 9월 광릉에서)
이 글을 쓴 게 1950년 4월인데 이때 소장자 간송 전영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두 사람은 이후 수 십 년 동안 멘토와 멘티로서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다. 원래 이름 최희순(崔熙淳) 대신 필명 순우(淳雨)를 지어준 것도 그였고 또 호인 혜곡(兮谷)을 지어받은 것도 그로부터였다.
관장 당시 발족한 박물관회의 회장 홍종인과 담소하는 모습
그의 박물관 인생에서 특기할 일은 매우 많다. 6.25때 유물을 지켜낸 일, 젊은 영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해 훗날 기둥이 되게 한 일, 강진에서 청자 기와를 발굴해낸 일 등등.
최순우의 성북동 옛집
현재 내셔널트러스트 시민문화유산 1호로 등록돼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에게는 한국민 전체가 빚을 졌다고 할 만한 일이 있다. 그의 혜안과 문화적 자부심은 1975년 암사동에서 발견된 빗살무늬 토기를 무심코 넘기지 않았다. 방사성 연대측정에 기원전 3천년이 나왔다.
당시 복잡 미묘한 한일 관계의 타계책이기도 했던 일본에서의 한국미술전시에 턱 하니 그는 ‘한국미술 5천년전’이란 제목을 달았다. 조몬 토기 운운하는 일본에서 그는 당당히 한국미술의 역사가 5천년의 유구한 것이라고 밝힌 것이다. 이로서 한국미술은 5천년의 역사를 지니게 됐고 이 말은 지금도 보통명사로서 사용되고 있다.
이것 하나만 해도 이 책은 충분히 일독의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