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지금
서동철 | 생각처럼 | 2012. 4
‘반전문가’라는 말이 있다. 그 분야에 대한 전문가는 아니지만 전문가에 견주어봤을 때 기본이상의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을 때 그렇게 부른다.
이 책의 저자 또한 문화재만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연구자는 아님에도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문화재에 대해 흥미롭게, 그리고 깊이 있게 설명한다. 문화전문기자로 활동하며 문화재를 얼마나 집중적으로 살펴보고 많은 관심을 기울였는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느끼게 하는데, 기자라는 직업 특유의 잘 정리된 글로 지루하지 않게 이야기를 풀어낸다.
왕건상
2006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북녁의 문화유산-평양에서 온 국보들' 특별전에 출품되었다.
1993년 고려 태조 무덤인 개성의 현릉에서 발굴되었는데, 발굴당시 좌상의 여러 곳에는 얇은 비단천과 금도금을 한 청동조각들이 붙어있어 옷을 입히는 형태였음을 알려준다. 나체로 만든 뒤 옷을 입히는 형태의 조각은 불교와 유교에서는 발견된 사례가 없으나 고려시대 토속신상에서는 착의형 나상이 존재한다. 고려수월관음도나 왕건상 처럼 얇은 천 너머 육체가 보이게 하여 살아있는듯 느껴지게 하는 표현은 고려시대 특유의 미의식을 보여준다.
총 42편으로 구성된 이야기는 꼭 문화재로 지정된 유물만을 설명한 것은 아닌데, 그렇기에 새로운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길상사 관음보살상
예를 들어 길상사의 관세음보살상에 관한 이야기도 흥미롭다. 이 관음보살상은 천주교 신자이자 성모마리아상과 성모마리아를 닮은 소녀상으로 명성을 얻은 최종태 작가의 작품인지라 이목을 집중시켰다. ‘종교를 가진 것을 티내지 말라’ 며 종교의 벽을 허무는데 앞장섰던 법정 스님과 ‘땅에는 나라도 종교도 따로 있지만 하늘로 가면 경계가 없다’고 했던 작가의 마음이 이심전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길상사 관음상은 불교 신앙을 위한 상에 머무르지 않고 종교 사이에 벽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 존재가 되었는데, 훗날 이 작품이 불교미술이 아닌 현대미술의 영역에서 평가될 가능성도 높지만 전통을 잃어버린 시대에 불교미술의 돌파구가 어딘지 생각할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긴카이(金海), 김해의 가마에서 주문생산한것으로 기자에몬오이도(喜左衛門大井戶)
그릇 표현에는 김(金) 또는 김해(金海)라는 글자를 새겼다. 조선의 막사발로 일본에서는 국보로 지정되었다.
또한 문제점에 대해서도 제기하는데, 지난 2006년 정부가 한국의 100대 문화상징을 선정하면서 막사발을 넣은 것은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 막사발은 한국이 아닌 일본 문화에 더 가까운데, 일본에서 16세기가 되면 다도로 선의 경지에 이르고자하는 다도가 퍼져나갔다. 막사발은 일본 다도의 대표적인 찻사발로 변신했는데, 임진왜란을 ‘도자기전쟁’이라고 하는 것도 권력을 가진 다이묘(大名)조선의 찻그릇에 빠지면서 조선 도공을 납치해 그릇을 굽도록 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막사발이라 불리는 찻그릇은 원형은 조선의 막사발이 원형이기는 하나 일본의 정치사회적 요구와 미의식이 가미되어 변형이 이루어진 일본식 찻그릇으로 봐야한다는 주장이다.
국보 제289호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왕궁리 오층석탑의 건립시기에 대해서는 학계의 의견이 엇갈렸는데, 미술사학자 강우방선생은 통일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됐던 이 탑은 백제의 것이라고 말했다. 그 이유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답기 때문이라는 감성적인 표현을 하였는데, 여기서 그치지 않고 추정하는 이유에 대해 제시했다. 이후 지붕돌에서 나온 금강경판이 백제 무왕 때 제작된 것이라는 이론과 금제사리합의 내합에 새겨진 구름문양과 연꽃문양이 결합된 연화서운문이 부여 능산리 고분의 금동산형투각장식과 비슷하다는 연구가 발표되었다. 2009년에 이르러서는 이웃한 미륵사터 석탑에서 백제무왕시절인 639년 이라는 절대연대가 새겨진 사리장엄이 나왔고, 이는 왕궁리 오층석탑의 사리장엄과 기법이 똑같다는 연구결과가 나오면서 일단락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저자의 이론적 견해만을 펼치는 것은 아닌데, 여러 미술사학자들의 추론을 소개한다는 점에서 학계에서 제기되는 주장 등을 한눈에 볼 수 있으며,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여러 각도로 생각 해 볼 수 있게끔 한다.
국립중앙박물관 '중국 사행을 다녀온 화가들' 기획전 당시 세한도 전시모습
8m 길이의 진열장으로도 모자라 다 펼쳐놓지 못했다.
이외에 아는 사람만이 아는 소소한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일화들을 전하고 있는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는 안견의 몽유도원도에 이어 두 번째 많은 제문과 발문이 붙어있는 조선시대의 그림이라는 점이나 긍재(兢齎) 김득신의 긍재라는 호가 전전긍긍(戰戰兢兢)이라는 ‘시경’의 구절에서 따왔다는 점 등이다.
정림사 초층탑신에 새겨진 소정방의 낙서(大唐平百濟國碑銘)
또한 정림사탑에는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탑의 1층 탑신에 당나라가 백제를 평정했다는 뜻의 글을 남겼는데, 낙서로 훼손되지 않았다면 남아있지 못했을 것이다. 소정방은 백제인들에게 정치적인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는 장소로 정림사를 택했는데, 이는 백제 땅에서 정치적 구심점 역할을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석굴암의 금강역사상
금강역사는 부처님의 호위무사이며 깨달음으로 이끄는 존재이다. 우리나라 금강역사상은 한 쌍으로 만들어져 인도와 간다라, 서역의 금강역사가 혼자 부처를 호위하는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석굴암에 대해서는 대부분 본존불을 중심으로 설명하는 것과는 달리 본존불을 호위하고 있는 금강역사상에 대해 설명한다. 왼쪽은 ‘아’형 오른쪽은 ‘훔’형인데 산스크리트어에서 ‘아’는 입을 벌리는 최초의 음성 ‘훔’은 입을 다무는 마지막 음성으로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시작과 끝을 상징한다. 일제 강점기에 석굴암을 해체, 보수하는 과정에서 금강역사상의 조각들이 수습되어 새로 조성했을 가능성이 점쳐지는데, 화재나 재난으로 새로 조성했을 가능성, 통일신라 말리게 석굴암을 중건하면서 새로 만들었을 가능성, 본래 두 쌍의 금강역사상이 계획되었을 가능성, 조성하기에 앞서 연습해본 흔적 등 미술사학자들의 추론을 정리하여 여러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 한다.
국보 제63호 절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철불 등에 돋을새김되어있는 명문
명문에 따르면 이 철불은 1500명 남짓한 지역민이 쇠붙이와 바위 덩어리처럼 굳은 마음으로 인연을 맺어 조성한 것으로 도피안사 비로자나불처럼 대좌까지 완벽하게 남아있는 철불은 찾아보기 힘들다.
보물 제 218호 관촉사 석조보살입상과 발가락
보살상의 발가락은 거대한 크기의 불상을 떠받치는 최하부 구조라는 기능만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일만큼 간략화 되어 발가락을 평가의 대상으로 삼았다면 큰 혹평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관촉사 보살사을 조성한 혜명은 강원도 원주 거돈사에 있는 원공국사 탑비조각에도 참여하여 놓은 경지의 세련된 조각솜씨를 보이므로 비례의 파괴가 불균형이 아닌 위엄일지도 모르며 애정을 갖고 본다면 발가락에서도 조각가의 장난기를 읽을 수 있다.
이외에 소설가 박완서가 술회했던 종교유적탐방을 이끌었던 신부님이 종교 조형물 가운데 으뜸으로 꼽았던 철원 도피안사의 철불 이야기, 우리 불교조각 가운데 미술사학자들에게도 여러차례 혹평을 받은 관촉사 석조보살입상의 발가락 이야기, 전란과 불화크기와의 관계 등에 관한 이야기는 흥미롭기 그지없다.
보물 제 1270호 영천 은해사 괘불, 영조 26년(1750)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끝나자 비명횡사한 이들의 영혼이 극락왕생하기를 비는 천도재가 필요했는데, 비좁은 법당에서 천도재를 여는 것은 불가능했다. 대규모의 불교집회를 위해 야외용 대형 불화가 제작되었는데, 영천 은해사 괘불은 현존하는 괘불 가운데 가장크다.
마치 라디오를 듣는 듯 존댓말을 사용한 문체는 친절한 설명이 되고, 이는 우리에게 문화재에 대해 다시 한 번 관심가질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있다. 책에 언급된 42가지의 이야기는 문화재를 새로이 또는 여러 각도로 보는 시선을 갖게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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