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문화재를 말하다
혜문 지음 | 작은숲 | 2012. 2
매주 토요일 밤, <그것이 알고 싶다>라는 프로그램이 방영중이다. 진실을 파헤치거나 미해결 사건들이 주를 이루기에 보고나면 어딘지 개운치 않지만 마치 프로파일러가 된 양 이런 저런 추리를 해보게끔 하고, 내가 사는 하늘아래 저러한 일들도 일어나는구나 하는 놀라움에 매주 채널을 고정하게 된다.
내가 당장 나서서 해결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불편한 사실이고, 직접적으로 와 닿는 일이 아니기에 외면하고 싶은 진실이지만 알아야하고 알려야하기에 방영되는 이 프로그램처럼 이 책 또한 그러하다. 외면하고픈 진실, 누군가 나서주길 바라는 마음에 안타까움 뿐이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그리고 해결하지 못한다한들 관심 가져야 할 ‘우리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책의 저자인 혜문스님은 ‘문화재 제자리 찾기’ 운동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으며 특히 작년에 일본에 있는 조선왕실의궤가 환수되면서 그 활동이 더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저자는 조선왕실의궤 환수에 앞장 선 것 외에도 문화재 제자리 찾기 운동을 지속적으로 진행하고 있는데 인터넷 검색을 통해 그와 관련한 여러 기사를 접할 수 있다.
용봉문 투구와 갑옷 (갑옷 사진 출처 : 연합뉴스)
23일자 신문기사(연합뉴스 링크: http://www.yonhapnews.co.kr/culture/2012/04/23/0906000000AKR20120423090000073.HTML)에 의하면 이 책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과거 일제가 강탈했을 개연성이 큰 조선 왕실의 투구와 갑옷 등을 일본 국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고 공식 인정함에 따라 환수 논의가 본격화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한다.
책에 실려 있는 저자의 반환을 요청하는 서신(평양율리사지석탑, 보스턴 미술관 라마탑형 사리구 반환 요청서 등)은 저자가 문화재 제자리 찾기 운동에 앞장서며 어떠한 노력들을 하는지를 보여주는데, 사람들은 문화재에 비중을 두지만 저자인 혜문스님은 제자리 찾기 라는 말이 주목받기를 희망한다고 한다. 왜곡되고 굴절된 사실을 직시하고 바로잡는 것이 제자리 찾기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다보탑의 돌사자(현재 남아있는 1구)
눈에 보이지 않으면 없는 셈 치게 되고 잊게 되는 법. 또 몰라서도 관심 갖지 않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아직 고국 땅으로 돌아오지 못한 유물은 상당수에 달한다. 본래 다보탑 기단부 네 모서리에 배치했던 돌사자는 현재 입부분이 손상된 1구만이 남아있는데, 1965년 한일협정 체결 당시 반환해야 할 석조 문화재로 언급했고 일본 언론을 통해 행방을 추적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도쿄 제국대 조교수 세키노 타다시가 고건축 조사를 마치고 귀국한 뒤 펴낸 <조선건축조사보고서>라는 책자를 보고 개성의 한 일본인은 그 자료를 토대로 불국사에 가 승려들을 협박하여 사리탑 1기를 일본으로 반출했다고 한다. 이후 사리탑은 정양헌이라는 요리점을 거쳐 도쿄의 한 제약회사 사장인 나가오의 정원에서 발견되었는데, 세키노 타다시의 설득으로 조선총독부에 기증하는 형식으로 불국사에 반환되었고 현재 보물 제6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때 다보탑의 돌사자도 반출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라 안타까울 뿐이다.
이천오층석탑 평양율리사지석탑
안타까운 마음만 더해지는 일화가 어디 이뿐일까. 오쿠라 기하치로에 의해 일본으로 반출되어 오쿠라 슈코칸에 있는 이천오층석탑은 일본 대지진의 여파로 석탑의 4층 몸체부분이 파손되었으며 답전체가 뒤틀렸고 옆에 나란히 있는 평양율리사지에서 가져온 석탑은 평양에서 반출되었다는 이유로 한일 양국 어디서도 문제 제기가 없는 실정이다.
익선관
임금의 정무 복식인 곤룡포에 갖춰 쓰는 관모로 <오쿠라 컬렉션 목록>에는 익선관의 주인이 고종 황제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약탈된 문화재는 이뿐만이 아닌데 오구라 다케노스테는 일제 강점기 문화재를 반출했던 대표적인 인물로 컬렉션 상당수가 도굴에 의한 수집품이다. 그러나 1965년 한일협정 당시 개인 소장품이라는 이유로 반환되지 못했다.
1965년 한일협정 당시 문화재 반환과 관련하여 우리정부는 제5,6,7차 회담을 통해 국유와 사유할 것 없이 총 4,479점의 반환 청구 품목을 작성하여 반환을 요구했지만 일본은 문화재반환에 대한 국제법의 근거가 없다며 약간의 품목만 자진 기증하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 결과 1,432점의 문화재가 정부에 인도되었는데 짚신 세 켤레, 막도장 20개, 집배원 모자, 영등포 우체국 간판 등이었기에 씁쓸함을 더한다.
(헨더슨컬렉션) 고려청자 주병, 12세기 (헨더슨컬렉션) 뱀 모양 장식의 가야토기
문화재는 비단 일본으로만 반출된 것은 아닌데, 헨더슨 컬렉션은 주한미국 대사관 문정관을 지냈던 그레고리 헨더슨에 의해 수집된 것으로 4세기부터 19세기에 걸친 도자기 컬렉션을 말한다. 헨더슨의 수집품은 한국에 재직하던 시절 선물 혹은 뇌물로 넘겨진 유물들도 있는데, 1988년 헨더슨이 사망한 뒤 부인 마이어 여사는 하버드대에 150여점의 도자기를 기증했으며, 도자기 외의 유물들은 마이어 여사가 사망한 뒤 경매회사로 넘어가 처분되었다. 하버드대는 도자기를 넘겨받으며 전시회를 개최했는데, 테마는 ‘하늘 아래 최고(First Under Haeven)’였으며, 최고품의 수준에 이르는 것들이었다.
안평대군, <금니사경>
상단에 '안평대군 진적(安平大君眞蹟)'이라는 글씨가 적혀있다.
문정왕후 금보, 현재 LA라크마박물관에 소장돼있다.
그리고 핸더슨의 소장품 중 아직 경매로 넘어가지 않은 안평대군 추정작인 지장경 금니사경에 대해 하버드대는 “원산국 국민들에게 이 작품이 소개되어야 하는 취지에는 공감하며, 한국에 전시하는 방법을 찾아보겠다”며 임대형식의 한국전시는 가능하다는 입장을 시사했다. 이를 비롯하여 6.25 한국 전쟁 당시 미국병사에 의해 약탈된 문정황후 금보도 잊어서는 안되는 우리의 우리의 유물이라 할 수 있다.
오타니 탐험대 <공양보살상>, 국립중앙박물관
3차에 걸쳐 중앙아시아 탐험을 실행하였다. 투르판 베제클릭 제15굴에서 약탈한문화재
그렇다면 우리나라에 있는 외국의 문화재는 없는 것일까?.. 책에서는 오타니 컬렉션을 예로들어 얘기하고 있는데, 일본 승려 오타니 코즈이가 수집한 돈황에서 투르판에 이르는 석굴 사원 벽화 등 중앙아시아 문화재인 오타니 컬렉션은 총독부박물관으로 사용하던 경복궁 수정전에서 전시하다가 해방과 동시에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으로 남게 되었다. 우리가 약탈한 것은 아니지만 약탈한 문화재인 오타니 컬렉션도 원산국 반환이 이루어져야 하는지 생각해보게끔 한다. 저자는 문화재 반환을 요구할 때 우리가 가진 외국의 문화재도 돌려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금은제 라마탑형 사리구
이를 비롯하여 아직 해결되어야할 일들이 많은데 저자와 정부의 문화재반환의 형태에 대한 이견 등이다. 예를 들어 일제 강점기 도굴되어 일본에 반출된 뒤 보스턴 미술관이 매입한 고려시대 라마탑형 사리구에서 사리만 반환하는 조건에 문화재청은 사리와 사리구는 분리될 수 없고 일괄 문화재중 부분만 돌려받는 것은 훗날 사리구 반환이 문제되었을 때 사리 반환 이상의 논의가 진전되기 어려워 좋지 않은 선례를 남기는 것이라 했다.
어떤 방식이 맞는 것인지는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지만 우리 문화재를 제자리로 돌려놓는 일이 간단치만은 않은 일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저자는 왜 승려가 문화재 제자리 찾기 운동에 열심이냐는 물음에 불교는 없는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것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모르고 사는 것이 미혹한 중생의 삶이라면 잃어버린 진실을 찾아가는 것이 수행자이고 구도자의 삶이며 금강경에 등장하는 단어로 말한다면 환지본처(還至本處)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다’ 또는 ‘돌아온다.’는 뜻이라고 한다.
환지본처(還至本處)
문화재 제자리 찾기는 단순히 문화재를 제자리에 돌려놓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 조상이 후손에서 물려준 정신을 찾는 과정이자 우리가 주인임을 깨우치는 것이기에 중요하다는 저자의 말이 가슴속에 남는다. 잠깐의 여행은 즐겁지만 긴 여행은 심신을 지치게 하듯 우리 문화재도 긴 여행을 끝내고 제자리로 돌아와 한 숨 돌리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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