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측메뉴타이틀
  • 한국미술 전시리뷰
  • 공예 전시리뷰
  • 한국미술 도서리뷰
  • 미술계 이야기
  • On View
  • 학술논문 브리핑
타이틀
  • [민화, 가장 대중적인 그리고 한국적인] - 민화의 모든 것
  • 9555      


민화, 가장대중적인 그리고 한국적인
정병모 지음 | 돌베개 | 2012. 3

민화는 전통회화 중에서도 마음 편히 볼 수 있는 그림이라 할 수 있다. 그림에 내재된 의미를 아는 것이 그림을 보는데 크게 작용하지 않으며, 작가에 대한 이해 또한 없어도 되기 때문이다.

이 때문인지 흔히 민화라 하면 그저 장식성이 강한 서민그림 혹은 병풍, 이름 모를 화가가 그린 조금은 저급한 그림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이는 알고 있는 대로만 받아들이려는 무관심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싶다.


<일월오봉도>, 세조상 뒤에 설치, 19세기후반, 마포 복개당, 국립민속박물관
궁화의 정수는 일월오봉도 병풍으로 임금이 않는 어좌 뒤에 설치하여 임금의 권위를 상징한다.

이 책은 민화에 대해서는 깊이있게 공부할 것이 없다고 여기는 마음에 경종을 울리는데, 민화에 대해 설명할 것이, 그리고 알아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를 보여준다. 우선 민화라는 용어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데, 책의 내용을 통해 정리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흔히 궁중장식화와 민화가 혼돈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일례로 궁중장식화인 일월오봉도가 민화전시와 궁중장식화 전시에 출품되는 경우가 있고 이로 인해 궁중민화라는 용어가 생겨나기도 했지만 실제로 일월오봉도나 십장생도는 엄연한 궁중회화이다.


<일월부상도>, 19세기, 삼성미술관 리움
일월오봉도 병풍은 서울 광통교 그림 가게에서도 팔렸는데, 이 그림은 궁중의 일월오봉도가 민화적으로 어떻게 변해갔는지를 잘 보여준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민화의 특색으로 작가의 무명성을 꼽았고 궁중회화 또한 작가의 이름이 명기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민화에 포함되었지만 궁중회화는 임금을 위한 그림이라 작가의 이름을 적지 않았을 뿐 실제로는 당시 쟁쟁한 궁중화원들이 참여했었다. 또 다른 점은 궁중회화는 일정한 규범에 충실하고 최고급 재료에 전면채색을 한 반면 민화는 값싼 재료에 부분채색에 그쳤다는 점이다.


두껍닫이 문에 장식된 서울 상류계층의 민화

민화의 정의는 일단 서민화가가 그린 그림을 말하며 그 다음 주목할 만한 사항은 민화의 양식인데 소박함, 원시성, 향토성 등이 해당한다. 다만 민화의 수요자는 서민에만 머물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는데, 19세기 말 사진을 보면 사대부가로 보이는 집 안방 문에 민화가 붙어있음을 알 수 있으며 민화 연구가 조자용은 초기에 민화를 수집할 때 많은 민화가 상류계층의 기와집에서 나왔다고 증언했다.


<까치호랑이>, 19세기, 경기대학교박물관
까치와 호랑이가 함께 등장하는 그림은 16세기 말 이후에 나타나는데, 민화라 하면 까치 호랑이가 떠오를 만큼 한국 민화를 대표하는 주제이다.

저자는 민화를 전통적인 분류방법에 따라 화조화, 인물화, 문자화, 산수화, 문방화, 누각화로 나누어 설명하였는데, 화조화는 유형별로 화훼도(꽃), 영모도(새와 동물), 어해도(물고기), 초충도(풀벌레와 야생화), 소과도(과일이나 채소)로 나눌 수 있다.


<모란도병풍>부분, 19세기, 온양민속박물관
궁중 모란도의 화려한 장식성을 지니면서 수석은 기린, 호랑이, 인물등의 모습으로 의인화 및 의물화 하였다.

자연물 하나하나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포도, 석류, 수박, 연밥처럼 씨가 많거나 넝쿨로 이루어진 것은 다산을, 십장생과 복숭아는 장수를, 모란은 부귀를, 원앙새는 부부결합을, 잉어는 출세를, 호랑이는 벽사를 의미하며 상상의 동물인 용은 복을 봉황과 기린은 태평성대를 상징한다. 지금 전하는 민화로는 화조화가 압도적으로 많은데  장식성 때문에 집안을 꾸미는데 적격이라고 할 수 있다.


<곽분양행락도>, 19세기후반, 국립민속박물관
당나라때 분양왕으로 봉해진 명장 곽자의가 가족, 신하들과 연회를 베푸는 장면을 그린 그림으로 가족이 많고 다복한 잔치를 그려 가정의 행복을 기원한다.


<강태공조어도>, 19세기, 파리 국립기메동양박물관
중국의 강태공 이야기를 조선식으로 변형하여 조선 복식을 한 인물이 등장한다.

인물화로는 고사인물화가 단연 많고, 풍속화, 종교화, 초상화가 그 뒤를 잇는다. 고사인물화는 민화로 유행하기 이전 궁중과 사대부 사이에 인기가 높았는데, 백동자도나 곽분양행락도, 삼국지연의도, 구운몽도 등에 담긴 흥미로운 이야기가 서민들에게 인기를 끈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유교문자도>, 19세기, 덕성여자대학교박물관           <백수백복도>, 20세기 전반, 계명대학교행소박물관 

효제충신예의염치(孝悌忠信禮義廉恥) 유교 덕목을 담은 유교문자도는 조선의 건국이념인 유교에 걸맞은 그림이었다. 다른 동아시아 국가에서도 ‘복록수’와 같이 기복적인 길상문자도가 주류를 이루었고 한국에서도 백수백복도와 같은 길상문자도가 제작되었지만 유교문자도 만큼 인기를 끌지 못한 것은 다른 동아시아 문자화와 구별되는 특성이다.


<산월과안(山月過雁)>, 19세기, 오카야마 구라시키민예관
한 화면에 소상팔경도 중 평사낙안과 동정추월을 담아 민화에서만 가능한 조합을 보인다.


<금강산도>, 19세기, 삼성미술관 리움
금강산 일만이천 봉우리를 나열하여 재구성하였다.

민화에서 산수화는 이전의 그림을 변형하거나 저잣거리에 떠도는 경치에 대한 이야기를 자유롭게 재구성하였는데 소상팔경도, 금강산도, 무이구곡도 등이 인기를 끌었다. 어떤 경치인지 알기 힘든 민화 산수화의 경우 소상팔경도라 하면 거의 맞을 정도로 소상팔경도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책거리>, 19세기 후반, 개인소장

문방화로는 책거리가 대표적인 예인데, 책가가 있는 그림인 책가도와 책가 없이 책을 비롯한 물품을 그린 책거리가 있다. 정조는 어좌 뒤에 책가도를 병풍으로 설치하여 학문의 중요성을 알렸는데 이후 고관대작들이 설치했고 민간에 확산되면서 민화의 장르로 자리 잡았다. 또한 여기에 길상적인 소재를 덧붙여 상징이 다양화 되었다.


<감모여재도>, 1871년, 뉴욕브루클린미술관
감모여재도는 대개 조상신을 모시는 사당을 그리는 반면 임금과 왕비를 모신 국혼전을 그린점이 특이하다. 1871년 6월 동향각에서 조성했다는 간기가 있어 제작연도와 제작지를 알 수 있다.  

민화에서 건물을 그린 누각화는 대부분 감모여재도와 같이 사당을 그린 그림이다. 감모여재도는 중국, 베트남에서도 유행한 주제로 제사 지낼 때 사용했는데 매우 경제적이고 이동이 간편한 사당인 셈이었다.  


『악학궤범』에 실린 <처용관복>, 1493년
조선 초기의 처용상을 볼 수 있는 자료이다.

다양한 민화를 접하고 나면 과연 민화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이러한 마음을 알아챈듯 민화의 역사에 관한 장이 시작되는데  책에 의하면 선사시대 바위그림은 민화가 갖고 있는 원초적인 감각의 원천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넓은 의미에서 민화의 역사적 시원을 찾는다면 울주 대곡리 암각화를, 좁은 의미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처용문배를 그 시작으로 볼 수 있는데 새해 첫날 집 대문 위에 붙인 문배가 세화로 발전하고 세화는 민화로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주악천녀상>, 고려후기, 경남 거창군 남하면 둔마리 고분벽화
고려시대 지방에서 제작된 민화풍의 소박한 그림이다.

고려시대에는 서민들의 종교화인 무화가 제작되었고 간접적인 자료지만 지방의 고분벽화에서 민화의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문배와 더불어 세화가 다양하게 전개되었는데 궁중을 중심으로 발달한 세화는 민간 풍습으로 저변화 되었다.

 
<노회신 부부 벽화묘의 백호와 주작>, 1456년, 강원도 원주시 문막읍

그리고 2009년에 알려진 노회신 부부 벽화묘는 조선초기 민화표현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세상의 관심을 끌었으며 민화표현의 벽화묘가 발견되었다는 것은 조선초기 화단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지장시왕도>, 1568년, 삼베에 채색, 일본 고쿠분지
16세기 서민 발원 불화의 대표적인 예로 민간이 발원하여 비단이 아닌 마에 그린 민간불화이다.


<분청사기 상감 버드나무와 물고기 무늬 자라병>, 15세기, 삼성미술관 리움
그릇 표면에 민화풍의 이미지가 표현되어 있다.

16세기에는 불화에서도 후원자가 서민으로 확대되면서 민화풍의 불화가 등장했다. 17세기에도 계속된 민간불화는 귀족들이 발원한 불화와는 바탕재료가 다르고 서민취향으로 그려져 민화적인 전통을 엿볼 수 있다. 또한 민화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은 분청사기에서도 경험할 수 있는데 각 지방의 특색이 드러나는 분청사기는 자유분방한 매력을 담고 있어 민화의 양상을 떠올려볼 수 있는 자료가 된다.


<기린도>, 19세기, 도쿄 일본민예관

그러나 실제 민화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18세기 이후인데, 조선후기에는 궁중의 세화가 민간의 세화로 저변화되고 이는 민화로 흡수되면서 민화의 주류를 이루었다. 또한 길상문화의 바람도 민화가 유향하게 된 배경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신분제의 변화와 상품화폐경제의 발달도 영향을 미쳤는데 부유해진 상인과 농민들로 인해 서민의 기층문화가 전면에 등장했다. 이로인해 19세기에는 민화의 수요가 대폭 늘었고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까지 절정기에 이르렀다.


<담배피우는 호랑이>, 20세기 초, 수원 팔달사 벽화


<군학도>, 1888년, 양산 통도사 명부전 벽화
민화 군학도의 편년을 가늠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민화가 성행했다는 증거는 사찰에서 볼 수있는 민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식민 통치가 이루어진 시기에 명랑하고 흥미로운 민화들이 제작된 것은 팽배해진 위기의식이 기복적인 믿음에 의지하게 했다고 볼 수 있다.


박생광, <십장생>, 1981년, 이영미술관
박생광은 민화와 무속화의 강렬한 채색과 이미지를 현대적으로 재조명하는데 주력했다.

이러한 민화는 1970년대 새마을운동을 기점으로 사라지지만 현대화가들은 민화를 작품의 영감으로 삼았으며 민화 수집가가 되기도 했다.


『한국의 향수』도룍표지, 2001년, 파리 국립기메동양박물관
한국민화의 아름다움을 유럽에 알리는 계기가 된 전시로 '환상적인 추상,을 한국 민화의 특징으로 들었다.

18-19세기 동아시아에서는 민화열풍이 일어났는데 동시적으로 민간의 기층문화가 역사의 전면에 부상하면서 민간회화가 발달했다. 책을 통해 중국과 일본, 베트남 등 한자문화권의 작품을 볼 수 있는데 이를 바탕으로 세계속 우리 민화의 예술성을 다시한 번 짚어보게 된다.


일본 헤이본샤의『한국, 조선의 회화』(2008)년 표지

민화는 대중화와 세계화와 가능한 우리미술이기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로 자리매김 할 날이 머지않았다고 할 수 있다. 민화의 가치는 외국인들이 먼저 발견하여 수집하였는데, 그저 속화라고만 여기며 다른 미술품에 비해 저평가했던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이 책을 권해본다. 많은 분량인 만큼 우리가 민화에 대해 알아야 할 많은 것들이 한 권안에 담겨있어 책장을 덮는 순간 민화에 대한 재평가를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귀중한 자료이다.

 

공유하기

편집 스마트K (koreanart21@naver.com)
업데이트 2024.10.27 17:18

  

SNS 댓글

최근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