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충돌과 미술의 화해
권영필 지음 | 두성북스 | 2011. 11
지는 해를 받으며 반은 빨갛고 반은 검게 물들어가는 모래 언덕 위를 일렬 종대의 낙타 등위에 흔들리며 하염없이 걸어가고 있는 캐러반의 모습. 이 롱 컷 장면이야말로 아마 장년쯤 된 한국인들의 머릿속에 새겨진 실크로드의 메인 인상일 것이다.
복희여와도, 8세기 아스타나출토, 국립중앙박물관.
오타니 탐험대의 수집품인 이들 중앙아시아 유물을 연구하기 위해 파리로 떠난 것이
필자의 실크로드학의 입문이 됐다.
80년대 국내에 방영된 NHK 제작의 걸작 다큐멘터리 ‘실크로드’는 이 장면을 시작으로 당시는 갈수 없는 나라 중국을 넘어 중앙아시아로 그리고 이름도 낭만적인 사마르칸트를 거쳐 로마까지를 보여주었다
그 여정위에 끝도 없이 펼쳐진 사막과 가련해 보이는 낙타의 행렬, 얇은 비단자락을 흩날리며 날렵하게 뱅글뱅글 춤을 추는 중앙 아시아의 아리따운 유목민 아가씨 그리고 바스러지는 흙더미로 변해버린 그 옛날의 이름도 생소한 토성 등등. 이국적이고 애수어린 타이틀 뮤직과 함께 이 방송은 수없는 낭만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대량으로 실크로드 팬을 양산했다.
아프라시압 벽화의 한 장면, 실크로드의 주역이었던 소그드왕의 신년제가 묘사돼있다.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압박물관
이처럼 실크로드는 당시로는 갈 수 없는 곳에 대한 애착과 볼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갈망으로 순도 높게 기화(氣化)할 뿐이었는데 일본에서는 이를 현실로 만들어 나라(奈良) 고분들 사이에 커다란 실크로드교류관을 만들어놓고 실크로드의 종착지가 나라임을 선언했다. 이곳에 가보면 대형 지도 위에 종착역 앞의 마지막 기착지로 경주에 빨간 램프가 달려있다.
아프가니스탄 출토의 금관, BC1~AD1 카불국립박물관
이 책은 60년대 후반 국립중앙박물관에 들어간 한 젊은 학예원이 한 상사로부터 ‘당신은 서역을 공부하시오’라고 명(命) 아닌 명을 받고 그 후 파리와 쾰른에 유학하면서 실크로드미술 전문가가 된 뒤에 그곳과 한국 미술을 나란히 연관지어 소개한 책이다.
천마총 출토 금관, 5세기, 국립중앙박물관
물론 처음부터 한국 미술속의 실크로드를 소개할 요량으로 목차를 세워 차근히 설명한 책은 아니다. 필자는 1997년에 『실크로드 미술-중앙아시아에서 한국까지』를 펴내 이 방면 최초 유일의 한국인 저자에 의한 가이드 북을 낸 바 있다. 이 책은 그 이후 계속 발표한 논문을 다시 묶고 2009년 국립중앙박물관 100주년 사업을 행했던 박물관원로 인터뷰를 부록을 다시 실어 엮은 책이다.
두 동물이 합쳐 탄생한 고대페르시아의 그리핀, 페르세폴리스
애초에 전문 학술지를 염두에 두고 쓴 글인지라 일반인들에게는 다소 장애가 있지만 낭만에 가득하고 팬의 열정이 있다면 극복 못 할 것도 없다. 실제로 생소하고 낯설지만 분명 한국 미술의 원류가 되는 내용들이 무궁하다. 오리가 대칭으로 머리를 맞딘 단검머리의 장식, 나뭇가지모양으로 뻗은 신라금관의 모양, 사마르칸트의 옛 수도 아프라시압 고분의 고구려인들, 경주의 고분과 탑에서 나온 로만 글래스 등의 원류를 소개하고 있다.
낙랑칠기에 표현된 그리핀 형태의 괴수. 국립중앙박물관
책의 독자들을 위해 중요한 내용은 남겨야 하지만 흥미로운 한국미술의 뿌리 한 두가지 소개해보자. 두 동물을 합체시켜 상상의 동물을 만드는 것은 고대 사회의 습속이라고 한다. 고대 바빌론에서는 독수리 발톱에 날개 달린 사자 모습인 그리핀을 만들어 냈다. 그런데 이 그리핀이 초원의 스키타이와 흉노를 거쳐 낙랑시대의 칠기 그림에 떡하니 재현되고 있다. 실크로드가 한국미술 원류가 달려온 길이기도 하다는 말을 입증하는 한 자료인 것이다.
평양출토 낙동 동경(銅鏡)의 묘사된 그리핀 유형의 괴수
또 하나는 헤라클레스가 동쪽까지 왔다는 설이다. 경주 사천왕사에서 출토된 벽돌에는 야차를 깔고 앉은 사천왕이 묘사돼 있다. 이 사천왕은 원래 인도에서는 귀족의 모습이었는데 중국을 거치면서 장군형으로 변화됐다. 사천왕사 출토된 벽돌에 새겨진 것도 장군형인데 이 사천왕이 입고 있는 갑옷이 특이하다. 어깨를 덮어주는 견갑(肩甲)을 보면 문양을 그린 것이 아니라 사자가 팔뚝을 물어뜯는 모습 자체가 갑주로 돼있다. 이런 형식은 사자가 깨물고 있다고 해서 깨물 교(嚙)를 써서 사교(獅嚙)형 장식이라고 하는데 어깨만 깨무는 것이 아니라 사람 머리를 깨무는 것처럼 된 모자도 있다.
경주 사천왕사 출토 전돌에 새겨진 사천왕상 모습. 어깨 갑주가 사교형 장식이다.
그리스 신화를 보면 영웅 헤라클레스가 네메아 골짜기에서 사자를 때려눕히고 사자 가죽을 어깨에 걸치고 다녔다고 한다. 그리스 조각이나 양쪽 대칭의 손잡이가 달린 긴 병인 암포라 등에 나타나는 헤라클레스는 그래서 사자 머리를 모자처럼 쓰고 있거나 아니면 어깨에 맨 모습 혹은 손에 든 모습으로 그려진 형태로 표현된다.
금강역사가 된 헤레클레스. 4세기, 간다라 파타-슈투르 유적.
그런데 동방을 점령한 알렉산더 대왕이 가계로 치면 헤라클레스를 시조로 삼고 있어 자신도 사자가 깨무는 형태의 사자머리 헬멧를 쓰고 다녔다고 한다.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 걸친 간다라 지방까지 진출한 알렉산더 대왕의 군대였고 보면 이 사교 형식의 갑주가 이곳을 거쳐 중국을 관통하며 경주까지 전해진 것을 짐작해보게 하는 대목이다.
최근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독일학자 리히트호펜이 비단이 전해진 길이라고 해서 이름붙인 돈황 저쪽의 중앙아시아 실크로드는 실은 고대에 향료의 교역로였다고 한다. 하지만 요즘도 명사산(鳴沙山)의 낙타 행렬을 떠올리는 가슴속에서 실크로드는 ‘한국 미술은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물음과 함께 여전히 좀처럼 식지 않는 연정 같은 존재이다. 일독을 권하지만 제목은 다소 과장되었다는 느낌이 없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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