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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필 - 역사와 해학의 글씨를 만나다] - 편액과 주련이 말해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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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필 - 역사와 해학의 글씨를 만나다
김남인 지음 | 서해문집 | 2011.11

현대는 가히 활자의 시대. 손으로 글씨를 쓰는 일은 점점 사라지고 있으나 컴퓨터 활자가 다양해지면서 타이포그래피처럼 글자의 조형적 아름다움을 찾는 것은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일상생활에서 서예를 대하는 일이 적어지는 반면에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디자인에서 붓글씨 같은 손글씨의 힘이 커지고 있다. 영화나 드라마의 타이틀을 만드는 것, 광고의 카피, 책의 표지 디자인에도 아름다운 붓글씨를 적용하는 일이 점점 많아지는 것이다.

옛 건물에 걸린 글씨는 굳이 책을 찾아보지 않아도 쉽게 명필을 만나는 좋은 기회이다. 문 하나 작은 건물 하나에도 이름을 붙여 걸고, 네 기둥을 비워두지 않고 좋은 글귀를 걸어두는 것은 전체적인 조형미에 의미를 담아 감상할 수 있도록 했던 조상들의 우아한 전통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책 『명필 - 역사와 해학의 글씨를 만나다』는 전국 각지에 있는 현판과 주련의 글씨들에 대한 안내서로, 저자는 이 책이 답사객으로 하여금 명필 앞에 쉽게 다가가는 역할을 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가까이에도 유명한 인물들의 글씨가 꽤 많이 남아 있다. 대표적인 명필의 보고는 서울 수유리에 있는 화계사. 화계사는 조선 말 흥선대원군(석파 이하응, 1820-1898)이 심혈을 기울여 중창불사한 만큼 그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그는 당대 출중한 명사였던 정학교, 신관호, 김정희 등에게 글씨를 받아 전각과 당우를 장엄했다.


 석파 이하응, 예서 필 <화계사>

흥선대원군은 승방에 걸려 있는 <화계사> 외에도 <명부전>, 주련 등의 글씨를 직접 써서 걸었다. 아들이 왕이 되게끔 해주었다고 믿은 화계사에 많은 감사의 흔적을 남긴 것이니만큼 각각 다른 서체이나 일반인의 눈으로 보기에도 하나같이 아름다운 작품이다.


위당 신관호, 해서 필 <화계사>

 
위당 신관호, 예서 필 <보화루>

위당 신관호(1818-1888)는 흥선대원군과 더불어 추사 김정희로부터 서법과 난법을 인가받은 당대의 명필로 추사에게 “조선에서 이보다 더 잘 쓰는 사람은 없다”는 극찬을 들은 이다. 석파의 예서 <화계사>와 위당의 예서 <보화루>에서 모두 추사체가 물씬 풍겨난다. 책의 저자는 위당이 흥선대원군보다 더 좋은 글씨를 뽐내지 않으려해서 겸양으로 쓴 글씨라 못 미쳐 보인다는 감상을 쓰고 있다. 흥선대원군은 집정하면서 삼도수군통제사로 있던 위당을 조정으로 불러들여 형조, 공조, 병조판서를 차례로 맡겼다고 한다. 요즘 같으면 측근인사라 볼 수도 있는 일. 어쨌든 위당은 남쪽에 있으면서도 해인사나 해남 두륜사 등에도 주련과 편액으로 명필을 남겼다고 한다.

강화도 전등사 대조루에 있는 <전등사> 편액은 누구의 글씨인지 알 수 없으나 네 기둥에 걸려 있는 주련은 위창 오세창(1864-1953)이 예서로 쓴 글씨가 걸려 있다.


위창 오세창, 전등사

내용과 함께 감상하면 더 좋으련만, 책에는 좋은 질의 사진도, 내용의 해석도 나와있지 않아 아쉽다.

강화도는 1871년 신미양요로 미군에게 철저히 농락당한 곳이기도 하다. 현장인 덕진진에는 ‘쇄국’을 주장했던 역사적인 증표가 남아 있다. ‘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 즉, ‘바다의 길목을 지켜 단 한 척의 외국 선박도 함부로 통과하지 못하게 한다’는 경구를 새긴 비석이 바로 그것이다. 신미양요를 겪은 후 대원군에 의해 고종 4년(1876년) 세워졌다.

대원군은 또 그해 4월 전국 주요 도시의 거리에 척화비를 세워 외세의 침입을 경계하도록 했다. 이 척화비의 비문은 대원군이 직접 짓고 글씨를 썼다 한다.


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

석파 이하응, 척화비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洋夷浸犯
   싸우지 않으면 이는 화친하는 것이니 非戰則和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과 다름없다 主和賣國

 

강화도에는 이밖에도 강화산성과 성공회 강화성당 등에 글씨가 많이 남아 있어 개화기의 흔적들을 엿볼 수 있다.

 

건물에 걸린 글씨만 새김글씨는 아니다. 여름에 깊은 계곡에 들어갔을 때 바위에 새긴 글씨들을 보며 누구의 흔적인지, 혹시 유명한 인물의 것은 아닌지 궁금할 때가 많은데, 충북 괴산군 화양구곡에도 그 예가 있다. 화양계곡은 조선 중기 노론 수장인 우암 송시열(1607-1689)이 만년에 은둔하며 살았던 곳으로, 제2곡 운영담에 전서로 써 있는 <운영담(雲影潭)>은 송시열의 제자 수암 권상하(1641-1721)가 쓴 것으로, 그는 마침내 우암의 수제자가 되고 성리학자로 대성했으며 숙종 때 우의정과 좌의정에 특임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관직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수암 권상하, 운영담(雲影潭)

우암 송시열이 책을 읽고 휴식하던 암서재 오른쪽 절벽에는 ‘충효절의 창오운단 무이산공(忠孝絶義 蒼梧雲斷 武夷山工)’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창오운단과 무이산공은 우암의 친필이며, 충효절의는 명나라 태조 고황제의 어필이라고 한다. 바위에 새기기 위해 쓴 글씨는 아니고, 다른 곳의 글씨를 모본으로 바위에 새긴 것.


암서재


명 태조 고황제, 충효절의(忠孝絶義)

제5곡인 첨성대에는 명나라 의종이 쓴 ‘비례부동(非禮不動)’이 새겨져 있다.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다는 이 글을 민정중이라는 이가 연경에서 구해 와 기증했다고 하는데, 명나라 임금의 글씨라 하여 호들갑을 떨며 암벽 상단에 석감을 만들고 새기고 인근에 암자를 지어 스님을 거주시키려 했을 정도로 정성을 들였다고 하니 쓴웃음이 나온다.


비례부동(非禮不動)

편액과 주련은 현대에 제작된 것이라도 보통 한자로 된 것이 대부분인데, 특이하게도 한글로 된 편액과 주련도 소개되어 있다. 운악산 봉선사의 큰법당 편액과 주련을 보면, 색다른 느낌을 주지만 아직은 어색하다. 한글로도 많이 쓰여지고 보여진다면 더 좋은 글씨가 남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운악산 봉선사

봉선사 큰법당


봉선사의 한글 주련

저자는 전국을 서울경기, 충청전라, 강원경상 세 권역으로 나누어 흥국사, 남한산성, 법주사, 갑사, 마곡사, 수덕사, 선운사, 송광사, 월정사, 직지사, 도산서원, 해인사, 통도사, 범어사 등 유명 사찰 등에 새겨져 남겨진 글씨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한 자리에 앉아 읽기에는 다소 어렵거나 지루할 수 있는 책이지만, 한번 훑어본 후 근처를 지나는 길에 이 책에 적힌 장소에 들러 편액과 주련에 담긴 이야기를 새기며 여행의 뜻을 더 깊게 한다면 흥미진진한 답사여행으로 만들어 줄 수 있을 듯하다.

편집 스마트K (koreanart21@naver.com)
업데이트 2024.11.12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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