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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전기 도자사]- 백자가 조선의 백자가 되는 과정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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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도자사
김영원 지음 | 일조각 | 2011. 8

세상이 좁아져 수만리 먼 곳의 소식도 손바닥처럼 들여다보고 있게 됐다. 그중 하나로 리비아 소식도 들리다. 변태적 지도자 가다피를 몰아낸 리비아는 모든 사람들이 거리로 뛰어나와 민주 혁명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혁명의 과실을 놓고 참여 세력들간에 논공 행상따지기도 만만치 않은 듯하다. 그래서 정작 필요한 새나라 건설이 여간 곤란하다 하지 않는다고 한다.


청자상감 덕천명 연류문 매병(靑磁象嵌 德泉銘 蓮柳文 梅甁),1309~1403년
높이 28cm / 호림박물관 '보물 1452호'

나라 하나를 새로 통째로 만들어내는 일이니 좀 힘들겠는가. 지지파 확충, 새로운 비전과 희망 제시, 생활 개선 그리고 곁들여 구세력, 낡은 시스템의 제거 등등. 아마 주역들에게는 하루가 이틀이라 해도 시간이 모자를 것이다.기억 속의 80년을 끄집어내 회상해보면 정치적 문제는 별개라 하더라도 지켜보는 사람들 조차 정신이 없었던 세상 변화를 경험했었다. 국풍 페스티벌, 컬러텔레비전 방영, 프로야구 탄생 등.


분청사기 진해인수부명 인화문 접시(粉靑沙器 鎭海仁壽部銘 印花文 楪匙), 15세기 전반
지름 14.6cm / 국립중앙박물관

 

1392년 고려의 장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고 새로운 나라의 기틀을 세웠을 때에도 해야할 일은 비슷했을 것이다. 달랐다면 당시에는 기껏해야 짚신에 소나 몰고 있던 시절이라 변화이든 개혁이든 속도가 요즘과 달리 한참 더뎠을 정도뿐.

백자 철화청화 삼산문 산뢰(白磁 鐵畵靑畵 三山文 山籟), 1451~1470년
높이 27.8cm / 삼성박물관 리움

 

이 책은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교체되면서 일어난 여러 일 가운데 도자기, 즉 왕실, 권문세가에서 사용되는 고급 도자기의 주류가 청자에서 백자로 어떻게 바뀌어갔는가 또 그 배경에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나 하는, 이른바 혁명기 이후 문화시스템 변화를 연구한 결과물이라할 수 있다.조선의 제1대 국왕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한 뒤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계승했다. 이것이 바뀐 것이 왕자의 난의 승리자인 이방원 태종때부터인데 나아가 고려적 문화와 조선적 문화가 시스템적으로 제대로 변화,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영명한 문화군주였던 세종이 들어선 이후부터이다. 한글 창제도 그런 과정중 하나라 할 수 있다.

분청사기 공안명 상감당초문 접시(粉靑沙器 恭安銘 象嵌唐草文 楪匙), 1417~1420년
지름 17cm / 호림박물관

 

책의 배경에 대해 조금 언급하자면, 필자는 조선 시대가 백자의 시대로 각인되는 상징적 사건을 사옹원(司饔院, 왕의 식사와 궁궐의 음식 공급에 관한 일을 관장하는 관청)의 분원(分院) 설치로 보고 그 분원의 설치 시기에 대한 연구를 집중해 그 내용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따라서 이 책은 학위논문 내용에 덧붙여 분원 설치의 필요성과 이후의 변화상을 덧붙여 조선시대의 도자사 흐름으로 정리한 것이다.


분청사기 상감초화문 사이호(粉靑沙器 象嵌草花文 四耳壺),1424년 무렵
높이 19.1cm(左), 21.2ㅊcm(宇) / 국립중앙박물관(정소공주무덤 출토)

 

태조에서 세종과 세조에 이르는 조선 초기에 도자기 사정은 도대체 어떠했는가. 조선 후기의 도자기는 백자 일색인 점을 염두에 두고 보면, 조선 초기는 실로 매우 복잡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고려청자, 분청사기, 조선백자 거기에 중국 수입의 명나라 청화자기 등이 한데 뒤섞여 있었다. 조선 백자 중에서도 고려시대 만들어지던 고려백자의 계통을 이은 연질 백자와 중국자기의 영향을 받은 경질 백자 등 갈래가 복잡했다.

분청사기 장흥고명 인화국문 대접(粉靑沙器 長興庫銘 印花菊文 楪匙), 1438년
지름 19.7cm / 국립중앙박물관

 

그리고 새로 만들어진 신생 왕조의 허약함을 파고들 듯이 명나라 사신들은 올 때마다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었다. 연회 자리에 금이나 은으로 만든 술잔, 그릇을 내놓으면 공물로 금은기(金銀器)를 요구했고 고령이나 광주 인근에서 잘 구은 상품 백자 그릇에 음식을 담아 대접 하면 이번에는 백자를 중국에 보내라고 했다. 또 왕조 수립에 공을 세워 지배층에 편입된 당시의 신흥세력들은 세를 과시라도 하듯 중국제 청화백자 수입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별다른 얘기이지만 나라가 망해가던 고려 말에는 지방에서 조정에 올리는 진상(進上) 자기중 개성까지 도착한 것은 1/100 밖에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악습은 조선 초기에도 쉽게 사라지지 않고 이어지면서 지방의 상품 자기소에서 제작된 자기들이 대궐로 옮겨지는 동안 상당량의 로스가 생기고 있었다.

분청사기 인화국문 태호(粉靑沙器 印花菊文 胎壺), 1462년 무렵
높이 35.7cm /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결과적으로는 문화적 통일성을 가져오는 계기가 됐지만 당시의 정권으로서는 어쨌든 관리, 통제 방안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왕자의 난이 지나고 문종, 단종의 가련한 일화도 정돈되면서 세조 말기 무렵 강력한 통제 밑에서 왕실용 도자기를 생산하는 체제가 갖춰지게 되는데 그게 바로 사옹원의 지방분원, 즉 경기도 광주에 마련된 분원이었다.

청화백자 군어문 호(靑畵白磁 群魚文 壺), 15세기
높이 24.7cm / 삼성미술관 리움 '보물 788호'

 

분원의 설치시기는 학자마다 조금씩 다른데 필자는 1467년, 세조 13년에서 세조의 둘째 아들되는 예종 원년(1469) 사이에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종한다. 참고로 덧붙이지면 흔히 한국미술에서 말하는 ‘분원 제작의 도자기’란 말은 사옹원의 지방 사무소인 분원이 1754년*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분원리로 고정되고 그 이후 이곳에서 만들어진 도자기를 가리킨다.


청화백자 매죽문 호(靑畵白磁 梅竹文 壺), 15세기
높이 41cm / 삼성미술관 리움 '국보 219호'

 

분원이 설치된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일상 생활용기에 대한 통제권이 강화되면서 왕실의 문화적 존엄이 강화되었고 조선초에 대량 생산되고 있던 분청사기는 분원 설치이후 점차 쇠퇴해갔다. 분원제작의 백자가 왕실의 문화적 상징이 되면서 조정의 관리, 평민들도 이에 영향을 받아 백자 사용을 선호하게 되면서 문화적 동질성이 생겨나게 됐다. 또 도자기 내부의 히에라르키가 생겨나 중앙요와 지방요의 구분이 생겨났고 사용 계층에서도 차별이 있게 됐다.

조선시대 초기, 백자를 전적으로 생산하는 관영 사기제조장(官營 沙器製造場)인 분원이 생겨나는 배경과 그이후의 변화 등을 학술적으로 추적한 이 책은 다소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노화방지 두뇌트레이닝이라고 생각하고 읽어보면 못 읽을 것도 없는 고급 내용이 담겨있는 책이다

 

 

편집 스마트K (koreanart21@naver.com)
업데이트 2024.10.30 0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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